[편집 후기] 편집자의 위험한 대여금고 - 『대여금고』
그렉 이건 『대여금고』
나는 『대여금고』에 빙의했을 때 가졌던 ‘독자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비 독자분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2024.03.15)
그렉 이건의 소설 「대여금고」엔 매일 아침 다른 사람 몸에 빙의된 채 깨어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만의 이름도 몸도 가져본 적 없다. 대신, 그에겐 대여금고가 있다. 자신이 기생했던 800여 명의 숙주에 대한 기록이 담긴 대여금고 말이다. 나도 대여금고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 안엔 내가 편집한(또는 빙의한) 책의 기록이 보관돼 있다. 그중 『대여금고』에 대한 기록을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위험한 대여금고’라는 제목처럼, 내 편집 기록은 위험하다. 누구한테? 바로, 나한테. 편집하면서 대단히 나쁜 일은 한 적이 없지만, 부끄러운 일은 많이 했다. 특히, 『대여금고』를 할 땐 더더욱. 작업물을 빨리 받고자 협업자에게 거짓 독촉을 한 일, 무리한 업무 진행을 부탁한 일 등등. 이 자리를 빌려 모든 분께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대여금고」의 주인공도 결말 부분에서 자신이 빙의했던 숙주들에게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한다. 자신이 일으킨 말썽 때문에 다음 날 곤란했을 숙주에게 사과하고, 자신에게 이름과 삶을 조금씩 빌려줬던 모든 숙주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데, 편집자도 한 권의 책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편집자는 노력 여하에 따라 기생을 할 수도, 공생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늘 공생을 하고 싶었다. 『대여금고』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여금고』 편집 초기에, 나는 걱정보단 기대가 컸었다. 전작 『내가 행복한 이유』와 『쿼런틴』이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얕은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내게 마케팅부 부장님이 경종을 울려주셨다. 이번이 그렉 이건의 최대 위기라고. 좋은 마케팅 포인트가 없으면 전작이 받았던 관심의 반의반도 받지 못할 거라고.
사실 전작 두 권은 내가 애써 찾지 않더라도 훌륭한 마케팅 포인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김초엽 작가님, 김겨울 작가님, 김상욱 선생님 그리고 그렉 이건의 오랜 팬분들이다. 이분들은 김상훈 선생님의 과거 번역물 덕분에 그렉 이건의 가치를 알고 있을뿐더러, 좋은 책은 더 널리 소개해야 한다는 멋진 신념을 가졌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렉 이건을 소개하는 일에 함께해 주시리란 확신이 있었고, 다행히 예상은 적중했다.
그리하여 그렉 이건과 김상훈 선생님의 과거 유산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된 두 전작. 그러나 세 번째로 소개되는 『대여금고』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과거 유산은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러니 새로운 힘을 구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그 힘을 찾고 싶어 헤맸고, 결국 마주한 것은 ‘독자’였다.
김상훈 선생님이 마감 직전에 해주셨던 말이 시작이었다. 『대여금고』에 수록된 14편을 한 편씩 받을 때의 일이다. “학제 씨가 원고 줄 때마다 진심으로 좋아해 줘서 기운이 났어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김상훈이 번역한 그렉 이건의 작품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라고 단순히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동료 마케터님과 SNS 홍보에 대해 얘기하던 중 깨닫게 되었다. 김상훈 선생님은 그때 독자의 마음에 큰 힘을 얻으셨던 거라고. 당시 마케터님이 한 말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렉 이건의 전작을 읽고 완전 팬이 됐어요. 그렉 이건은 꼭 많이 사랑받게 하고 싶어요.” 그 얘기를 듣는데 이상하게 힘이 났더랬다. 뒤이어 그렉 이건 차기작 때문에 연락을 주셨던 독자분들이 떠올랐다. 그 성원이 담긴 메일과 전화들. 그것들을 받고 얼마나 힘이 났던지. 이 힘. 이 엄청난 힘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을 순 없을까?
그 질문에서 시작해 현재의 『대여금고』로 이르렀다. 우리가 독자의 마음을 마케팅 포인트로 잘 구현한 것일까? 다행히 책은 잘 움직이는 중이다. 아직은. 이 ‘아직은’을 없애기 위해 오늘도 독자의 마음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렉 이건을 읽고 싶게 만드는 그렉 이건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대여금고』에 빙의했을 때 가졌던 ‘독자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비 독자분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필자 | 김학제 문학편집자. 허블 편집팀장을 맡고 있다. 『내가 행복한 이유』, 『쿼런틴』, 『대여금고』를 편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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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편집자. 허블 편집팀장을 맡고 있다. 『내가 행복한 이유』, 『쿼런틴』, 『대여금고』를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