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성의 날] 엄마의 혀에게 - 김지승 작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 김지승 작가
너는 사람들의 머릿속 ‘여자’들이 풍선처럼 부풀다가 일제히 펑 터지는 상상을 한다. 엄마가 입에 넣어준 포도알이 터진다. 과즙을 삼키며 너는 엄마의 혀(mother tongue)를 떠올린다. (2024.03.07)
채널예스 여성의 날 특집 기획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들은 선입견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소설, 영화, 과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형성을 부수고 다채로운 욕망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돼.”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고 머리는 서서히 좌우로 움직이며 눈에는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이름 없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 방식. 금기와 여자가 손을 잡으면 묵은 불안과 죄책감이 따라붙는다. 맥신 홍 킹스턴이 쓴 『여전사』의 시작도 그렇다. 엄마가 딸에게,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아 태어나지 않은 거나 다름없는, 집안에서 금기가 된 한 여자에 대해 “쉿, 아무에게도…”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 너도 나처럼 금기와 침묵으로 입을 열게 될 거다. 그렇지만 나처럼 살아서는 안 돼. 아니, 그렇다고 나를 두고 너무 멀리 가진 말고. (내가 나의 불행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너는 어쨌든 행복해지렴. 엄마 말 알아듣겠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너는 1960년대의 딸이고, 어느 날 “남자처럼 쓴다”는 말을 듣는다. 놀랍게도 칭찬이다. 반면 여자처럼 쓴다는 말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칭찬이 되지 못하리라는 걸 깨닫게 해준 말. 일찍이 에이드리언 리치가 호소한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여자 사이에서” 분열하는 괴로움은 남자처럼 쓴다는 칭찬 앞에서 세 갈래로 찢어진다. 너는 창작 의지가 꺾인 채 원고를 불태우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거나 다시 노트와 연필을 사고 산책을 시작했다고, 1990년대 딸이 읽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90년대의 딸인 너는 “남자처럼 쓴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적어도 이제 그 말은 칭찬으로 쓸 수 없다. 대신 이런 말을 듣는다. “넌 여자처럼 쓰지 않는구나.” 앞뒤에 앉은 친구들의 낮은 한숨소리. 흔히 여자들이 쓰는 것과는 다르다고. 다시 한 번. 칭찬이랍시고. 너는 강의 자료로 받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첫 장에 시선을 두고 반응하지 않는다. 옆자리 친구가 자기 노트를 네 쪽으로 민다. 여자처럼 쓰지 말 것. 그 옆에 조그맣게, 씨발. 네가 보고 웃자 친구도 웃는다. 여자처럼. 그런 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여자처럼, 이라고 할 때의 그 여자는. 엄마가 빨간색 실이 되어 손등 위를 지나간다. 엄마는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언제 어디서든 출몰할 수가 없다. 여자처럼 쓰지 않는 네게 금방 엄마의 색이 옮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얀 뼈와 잉크로 왜 쓰지 않는 거니? 빨간색이 다그친다. 너는 저자였던 적이 없는 여자 33명이 ‘저자의 죽음’을 읽으며 줄을 긋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33개 손등의 푸른 정맥들이 빨갛게 변한다.
너는 또한 2020년대의 딸. 저자의 무엇도 드러나지 않는 글이 훌륭한 글이라는, 한 시인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목소리로 “아름다움”이란 말을 열 번쯤 듣는다. “우아함”은 세 번, “예술성”도 세 번. 최후의 첨삭은 여자임을 드러내지 말 것. 너는 너를 지우고 외면함으로써 우아해지는 글과 그들을 남겨놓고 나온다. 『3기니』에서 어리석은 선동을 하느라 예술성을 집어던졌다고 비판받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너는 ‘여자’라는 임시대피소에서 읽고 쓰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른다.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라고 낭송한 최승자를,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글쓰기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엘렌 식수를, “나는 영원히 다른 여성 안에 있는 한 명의 여성이다”라고 쓴 트린 민하를, “바로 그 여성은 모든 여성의 여성이다”라고 고백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그러니까, 너의 많은 엄마들을. 너는 그 여성들의 여성이 되고 싶어서 영영 읽고 쓴다.
다시 60년대의 딸인 너. 이 글을 쓴 사람은 여자일까요, 남자일까요. 여자네, 라고 엄마가 대답한다. 여자요? 그래, 우리 같은 여자. 너는 사람들의 머릿속 ‘여자’들이 풍선처럼 부풀다가 일제히 펑 터지는 상상을 한다. 엄마가 입에 넣어준 포도알이 터진다. 과즙을 삼키며 너는 엄마의 혀(mother tongue)를 떠올린다. 90년대의 딸인 너에게는 다른 것도 떠오른다. 쓰기 위한 질문 하나. 글을 쓸 때마다 당신을 가로막고 당신의 언어를 탈취하는 가장 오래된 괴물은 무엇입니까? 대답 대신 기억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쉿. 어둠이 빛의 틈새를 재빠르게 장악하는 소리. 부재가 순식간에 무대 위를 차지하는 그 소리 뒤로 단호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인 동시에 자유로울 수는 없어.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여러 세기 동안 엄마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지만 이제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은 너는 2024년의 딸이다.
늙는 건 여자뿐이지. 엄마의 말을 받아 적는다. 늙으면 이미 여자가 아니지만. 뜻밖의 말도 받아쓴다. 너와 엄마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둥글게 이어 붙인 테레사 학경 차의 “발수신자 (sendereceiver)” 같다. 그에게 둘은 언제나 이미 관계하고 항상 결합되어 연결된다. 너는 읽기와 쓰기도 그렇다는 걸 안다. 연결된 행위이자 존재 방식인 읽기-쓰기의 상호호환을 저독자(writereader)라 표현해도 좋을까. 그건 너와 엄마다. 할 말이 넘친다. 침묵 속에서 엄마의 혀를 나눠 받는다. 너는 엄마의 혀를 숨기고 깨물고 삼키며 기울어진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바꿔나간다. “착하다”는 더 이상 착하지 않고, 그 반대도 의미를 잃는다. 아직 세상에 도달하지 않은 언어의 자리는 괄호로 마련해 둔다. 과거와 미래가 공동으로 낳은 질문을 키우며 딸들이 쓰는 글의 원산지는 같고 또 다를 것이다. 그곳에서 너와 엄마는 사과와 배처럼 재회한다. 쉿,
엄마의 혀에게. 내가 당신의 다른 생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필자 | 김지승 읽고 쓰고 연결한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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