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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칼럼] 부드럽게 되살아나며 시간의 빈 곳을 채우는

김선오의 시와 농담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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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이라니. 내가 시인이라니. 요즘도 가끔 누가 시 잘 읽었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 오면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 화들짝 놀란다. (2024.03.07)


나이트 사커. 나의 첫 시집 제목이다. 밤에 하는 축구라는 뜻이다. 시집을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해달라는 제안 메일을 받았을 때 아껴 읽고 좋아했던 수많은 시집의 제목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중 물론 나이트 사커는 없었다. 나이트 사커, 나이트 사커. 발음해볼수록 이상하다. 영어지만 한국어 억양으로 읽는다. 한국어에 존재하는 합성어는 아니다. 나이트 사커는 그냥, 나의 첫 시집 제목인 것이다.

첫 시집이라니. 내가 시인이라니. 요즘도 가끔 누가 시 잘 읽었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 오면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 화들짝 놀란다. 제 시를 읽으셨어요? 어떻게요? 그런 마음이 된다. 책을 네 권이나 출간했는데도…… 도무지 내가 작가라는 사실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내 글은 아직도 친구들이나 읽어주는 내밀하고 그저 그런 기록들인 것 같다. 책이라는 형식보다 낱장으로 인쇄된 에이포 용지나 십 년 넘게 이웃 공개로 일기를 써 온 네이버 블로그 화면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지금도 이런데 첫 시집이 출간되었을 무렵에는 더 심각했다. 나의 시들이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권위를 얻었다는 사실이 낯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근사한 패턴이 입혀진 검푸른 표지에 ‘나이트 사커’라고 적힌 이 책이, 적당히 얇고 적당히 도톰하게 느껴지는, 뒷장에 바코드가 박힌 채 상품으로 기능하고 있는 이 물건이 내 시집이라고? 낭독회의 관객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척 꺼내들고 읽었지만 그 모든 것이 연기였다는 사실을 고백해본다. 집에 있을 때는 시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책과 나 사이의 관계가 너무 어색해서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불과 삼 년 전의 일이다. 그 사이 나이트 사커와 나의 관계는 많이 개선되어서 이제 나는 혼자 있을 때에도 책을 펼쳐볼 수 있다. 과거의 시집과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뜻이다. 당시의 내가 지금의 내게 거의 타인이 되었기에 어떤 방식의 용서가 가능해진 것이다. 음 생각보다 괜찮군 하고 느낄 때도 있고 음 너무나 부족하군 하고 느낄 때도 있다. 처음이라는 것은 신기하군, 나는 변하는데 글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다른 시인의 첫 시집을 읽을 때처럼 관대해진 동시에 지금의 나에게 함유되어 있는 과거의 나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과거의 시에서 나의 현재 혹은 미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첫 시집에 대한 사족을 늘어놓았다. 지난겨울 열흘 정도 태국의 작은 섬에서 지냈다. 더운 지방의 동물들이 흔히 그러하듯 길고양이들은 인간에게 살가웠다. 태어난 지 삼 개월쯤 되어 보이는 검은색 아기 고양이를 항구 근처에서 만났다. 꼬리가 하트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동행과 나는 그 친구의 이름을 ‘톤’이라고 지어 불렀는데 전날 우리가 플랑크톤 투어를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톤은 숙소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고양이와 놀고 있는 우리를 보며 호텔 직원은 ‘유 캔 테이크 허 유어 홈’ 하고 데려가라는 듯 말했다. 톤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자꾸 내 품에서 잠드는 톤에게 나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눈 감은 톤은 너무 작고 까매서 박쥐처럼 보였다. 박쥐야? 너 사실 박쥐지, 우리는 톤을 대충 박쥐라 불렀다. 자다가 눈을 뜨면 톤은 작은 머리를 동행의 손 안에 집어넣고 잠들어 있거나 놀아달라고 나를 때리고 있거나 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욕실 문 앞에서 얼른 나오라고 울부짖었다. 숙소 문을 열어두어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얘가 나를 엄마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이틀 뒤에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하소연하며 톤의 얼굴을 보여주자 톤, 네 시에 나오는 박쥐같다, 친구가 말하며 나도 잊고 있던 내 시를 읽어주었다.


박쥐를 주웠다. 골목으로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박쥐는 가늘다. 보고 있으면 비가 내릴 것 같다. 검은 해의 파편처럼. 짙은 몸으로 떨고 있구나. 손바닥 위로 검정을 눕히면 손바닥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다. 다른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동족이라 우기면 발톱이 희미해질 것 같다. 날개의 감촉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몸의 색을 뭉쳐 너를 먹여도 되니. 박쥐, 박쥐 부르면 날아갈 거니. 쪼그려 앉아 박쥐를 주웠다. 눈앞에 한 마리의 박쥐. 등 뒤로 즐비한 박쥐. 내게 매달리는 박쥐를 주웠다고 말해도 될까. 팔목의 상처를 자랑해도 될까. 그러면 터널이 불타오를까. 밤이 멀었는데 박쥐를 안아도 돼요? 그림자가 찢어진다. - 「박쥐를 주웠다」 전문


시에 예언이라는 기능이 있었던가. 화자가 주웠다는 박쥐는 정말이지 톤 같았다. 오 년쯤 전에 쓴 시였는데 어떻게 쓰게 된 시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친구는 미래의 일이 시에 섞이기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섬은 너무 작아서 동쪽 바다에서 서쪽 바다까지 십 분이면 걸어갈 수 있었다. 동행과 나는 톤을 처음 만났던 동쪽 바다 근처 항구에 톤을 데려다주었다. 섬사람들이 이전과 같이 톤을 잘 챙겨줄 것이라 믿으면서. 나 없이 못 살 것 같았던 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동쪽 바다의 바위산에 뚫린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이 정말 박쥐같았다. 섭섭하게도 매우 신나보였다. 한국에 돌아와 『나이트 사커』를 펼쳤다. 과거에 적힌 시는 현재로 부드럽게 되살아나며 시간의 빈 곳을 채우기도 한다고 생각하면서. 톤, 잘 있니? 사랑했다.


나이트 사커
나이트 사커
김선오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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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선오(시인)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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