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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미래에는 비키니보다는 추리닝

추리닝은 문명의 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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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보여주는 옷은 누가 봐도 편리한 신소재 추리닝이어야 하지 않을까. SF에서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옷을 보여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금속성으로 빛나거나 바스락거리는 옷이 과연 통기성, 흡습성, 신축성이 보장될까? (2024.03.06)


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pexels


집에서 일하다 보니 매일같이 ‘추리닝’을 입게 되었다. 남에게 보여주기보다 내가 편하게 생활하는 일이 훨씬 중요해진 탓이다. 의복의 역사를 아름다움과 편리함이라는 두 가치가 대결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추리닝은 편리함 진영의 으뜸가는 전사다. 넉넉하고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점에서 추리닝이야말로 궁극의 의복이다. 여성 정장은 드레스에서 바지로, 신축성 좋은 슬랙스로 진화했다. 생각해보면 교복도 오래 입을수록 추리닝에 가까워진다. 교복 치마 아래에 체육복 바지를 입는 차림이 대표적이다. 아니면 면 티셔츠를 입고 교복 상의는 걸치기만 한다든가. 인간의 섬유 기술은 최고의 추리닝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나는 여름엔 폴리스판덱스로 만든 ‘냉장고 바지’를 입는다. 겨울에는 마이크로 아크릴과 레이온 등이 혼방된 히트텍을 입는다. 이번 겨울부터는 ‘양털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기모 처리한 폴리에스테르, 즉 ‘후리스’를 안감으로 사용해 추운 날씨에도 엄청나게 든든한 옷이다. 덧붙여 브래지어는 무조건 와이어가 없어야 하고, 속옷은 모달이나 텐셀이 최고다. 한국의 여름과 겨울을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견디려면 추리닝이 필요하다. 추리닝은 문명의 정점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보여주는 옷은 누가 봐도 편리한 신소재 추리닝이어야 하지 않을까. SF에서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옷을 보여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금속성으로 빛나거나 바스락거리는 옷이 과연 통기성, 흡습성, 신축성이 보장될까? 더군다나 오래된 SF에 나오는 ‘우주 여전사’ 복장은 노출이 심한 만큼 더욱 기능적이지 못하다. 총 들고 싸우는 사람이 대체 왜 기능성 슈트가 아니라 비키니 팬티를 입는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영화 <바바렐라>를 보면 생각이 깊어진다. 이 영화는 섹시한 여전사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바바렐라가 입는 옷은 편리함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이 비합리적이다. 이는 실제 미래의 모습보다는 과거의 성차별적 시선을 반영한다.

영화는 주인공 바바렐라가 우주복을 벗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갑을 벗으면 가지런히 정리된 가늘고 긴 손가락이 드러난다. 다음에는 매끄러운 맨다리다. 어째서인지 바바렐라는 은색 우주복 아래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바바렐라의 우주복은 파츠를 하나씩 잡아당겨 벗도록 만들어져 있다. 부드럽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바바렐라는 천천히 공들여 맨몸이 된다. 일상생활이라기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동작이다. 관객은 오프닝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3분 동안 바바렐라의 몸매를 잔뜩 감상하게 된다. 이는 영화의 압축요약이나 다름없다. <바바렐라>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오프닝에서 하던 일을 충실하게 반복한다. 바바렐라에게 난해한 옷을 입힌 뒤 그걸 벗기는 일이다.

설정상 41세기의 ‘우주 여전사’인 바바렐라는 실종된 과학자 듀란듀란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받는다. 그녀는 감지기의 신호를 따라 퇴폐적인 도시 ‘고돔과 소모라’에 진입한다. 알고 보니 듀란듀란은 그곳에 숨어 있던 사악한 악당이다. 이런저런 갈등 끝에 악당은 자멸하고 도시는 무너진다. 바바렐라는 새로 만난 이들과 그곳을 탈출한다. 지극히 뻔한 내용이다. 게다가 영화는 개연성에 별 관심이 없다. 애초에 듀란듀란을 왜 찾아야 했는지, 임무는 어떻게 되는지는 불명확하다. 바바렐라는 섹시하고 순진한 금발 미녀로서 그저 열심히 위기에 처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바바렐라의 옷은 찢어지고 벗겨진다. 이 영화에서 옷은 주인공의 몸매를 드러내는 기능 외에는 쓸모가 없어 보인다.

바바렐라 역할을 맡은 제인 폰다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인 폰다의 적극적인 사회 운동 및 페미니즘 활동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바바렐라>를 좀 좋아한다. 촌스러운 연출과 어처구니없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세련된 덕분이다. 그리고 여자주인공을 눈요깃감으로 박제하는 데 미묘하게 실패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조력자들은 악당들만큼 뜬금없이 나타난다. 그들은 바바렐라를 유혹하려 든다. 그리고 바바렐라에게 성적 만족감을 선사하려 애쓴다. 이를 통해 바바렐라는 쾌감에 눈을 뜬다. 41세기 지구 사람들은 육체적 자극 없이 정신적 교감만 나누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다. 덕분에 바바렐라는 만족스러운 모험을 즐긴다. 영화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지점이다.

특히 듀란듀란이 바바렐라를 고문하려는 장면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듀란듀란은 자신이 개발한 특수한 오르간에 바바렐라를 넣는다. 오르간을 연주하면 안에 있는 사람은 과도한 성적 자극을 받아 죽게 된다. 음악이 고조될수록 바바렐라는 열기에 들떠 신음을 흘린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진짜 위기는 오지 않는다. 듀란듀란이 아무리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간을 연주해도 바바렐라는 뻗지 않는다. 오히려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오르간이 먼저 고장난다. 결국 도구를 동원해도 상대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 남자와, 영문을 모르고 ‘벌써 끝이야?’라는 표정을 짓는 여자가 남는다. 듀란듀란은 태도를 바꿔 바바렐라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친다. 정말이지 하찮아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웃기는 구성 덕분에 바바렐라의 비키니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여자주인공을 섹시 아이콘으로 삼는다는 문제가 사라지진 않지만, 그래도 불쾌함은 상당히 줄어든다. 바바렐라는 무슨 옷을 입든 상관없이 모험의 주역이다. 이는 다른 SF 영화인 <스타워즈 6>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레아 공주는 노예가 되었을 때 금속으로 만든 비키니를 입고 나타난다. 아무리 노예의 복장이라 하더라도 광선검과 호버크래프트를 만들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 그것도 행성 전체가 사막인 곳에서, 구리로 만든 비키니가 살아남은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레아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여주려는 제작진의 의도라고 할밖에. <스타워즈 6>는 <바바렐라>와 달리 레아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데 비키니를 사용한다. 그건 수치스러운 복장이므로 웃을 수 없다. 편리하기는커녕 편안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추리닝의 반대 극단에 있다. 다시 말해, 더 구식이다.

다행히 SF 속 비키니는 사라지는 추세다. 애니메이션 <우주의 여왕 쉬라>를 리메이크한 <우주의 전사 쉬라>는 쉬라가 입었던 튜브탑 원피스를 민소매와 반바지 조합으로 수정했다. 새로운 쉬라는 가슴골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과거 <스타 트렉>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는 여성 승무원에게 짧은 원피스를 입혀 비난을 받았다. 그건 화폐와 마약이 사라질 정도로 이상적인 미래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그래서 미니스커트에 관한 설정이 추가된다. 편안하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스타일이며 원한다면 남성 승무원도 입을 수 있다고. 실제로 나중에 나온 에피소드를 보면 짧은 원피스를 입은 남자가 돌아다닌다. 더욱 나중에 나온 시리즈에서는 원피스 형태의 제복 자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주먹구구이긴 해도 어쨌거나 추리닝의 방향이다.

지금까지 본 중에 최고의 추리닝은 찰스 스트로스의 『유리감옥』에 나오는 미래의 옷이었다. 주인공은 기술적 특이점 이후의 미래에 살다가 사정상 갑자기 20세기의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다. 기술적으로 엄청나게 뒤떨어진 세상이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용 의복을 보고 깜짝 놀란다. 당연하게 있어야 할 기능이 죄다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는다. “가장 괴이한 건 의복이 너무 멍청하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멍청한가 하면 먼지가 묻는 걸 방지하거나 피부 박테리아를 먹어 치우지도 못하고, 유행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며 대화 상대 역할도 못했다. 그리고 의상에는 주머니가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재킷의 봉제선 속에 눈에 띄지 않게 숨겨놓은 전송게이트조차 없었다. 도대체 언제 발명된 옷인지 궁금해졌다. 나중에 지능이 높은 복장을 찾아봐야겠다.”(75쪽)


나는 전송게이트까지는 바라진 않지만 최대한 기능적이면서 편한 옷을 입고 싶다. 기왕이면 친환경적으로 제작되는 옷이면 좋겠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폴리에스테르 소재는 저렴하고 튼튼하지만 미세플라스틱으로 환경을 오염시킨다. 염색 작업은 깨끗한 물을 대량으로 소모한다. 옷에서 부가적으로 발생하는 화학물질은 입는 사람의 몸에도 유독하다. 그러니 비용이 지나치게 부담스럽지 않다면 패스트패션보다 튼튼하고 좋은 옷을 오래 입는 쪽으로 향하고 싶다. 온갖 합성섬유를 입고 지내면서 품기엔 과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동물착취를 그만두는 방향으로는 성공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모피코트 대신 롱패딩을 입는다. 그것도 오리털, 거위털보다 웰론이나 신슐레이트로 제작한 패딩을 고를 수 있다. 다음 단계로는 어떤 옷이 가능할까? 궁극의 추리닝을 만나려면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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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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