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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어떻게 도서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자신을 열어주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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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두 살에 처음 모험을 했을 때, 나는 읽어야 할 모든 책이 무료로 꽂힌 책 선반을 발견했다. A부터 Z까지 편리하게 정리된, 좋은 상태의, 새것과 오래된 것, 양장본으로 된 것들을.” (2024.02.07)


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pexels


“저기 말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맛있는 가게를 많이 알 수 있어?”

요시나가 후미의 자전적 만화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의 대사다. 이 말에 주인공은 정색하며 답한다. “나는 말이지. 일하고, 잘 때 빼고는 거의 46시간 동안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 아니, 일에 따라서는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먹는 것을 생각하지. 내가 이만큼 음식에 인생을 바쳐왔으니 음식도 나한테 조금은 뭔가 보답해줘야 하지 않겠어?” 이 장면은 내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하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지식이 쌓인다.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의 데이터베이스는 그 사람의 삶으로 다져지는 것이다. 그리고 둘,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에는 보답이 있다. 설령 대상이 무생물이라도 마음을 쏟는 일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라 상호 교류가 일어나는 사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애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은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일은 어떨까? 나는 답을 안다. 조 월튼의 『타인들 속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책을 충분히 사랑하면, 책들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 책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주인공 ‘모리’는 소설 후반부에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마녀, 그녀의 어머니와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 마법을 사용하는 싸움이다. 상대는 책을 마구 찢어 종이를 창으로 만든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창이 날아든다. 모리는 창이 된 종이를 무엇으로 바꿔야 반격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종이는 나무에서 나온다.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나무는 나무이고 싶어 한다. “창들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었고,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와 가시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마가목과 전나무로 변했고, 다 자라 잎이 무성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었다. 이윽고 나무들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무였다가 종이가 되고 책이 되었던 그 존재들은 자신에게 다시 뿌리를 부여한 주인공을 위해 움직인다. 사랑은 도처에 있다.

모리가 책을 사랑하게 되는 배경은 도서관이다. 도서관에 다니기 전에도 모리는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소녀였지만, 도서관이야말로 책을 ‘충분히’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모리처럼 돈이 없는 청소년이라도 도서관에선 책을 원하는 만큼 잔뜩 읽을 수 있다. 원하는 책이 없다면 희망도서 구입 신청을 할 수 있다. 혹은 다른 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찾아볼 수도 있다. SF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은 진심으로 감격한다. “도서관 상호연계 대출은 세상의 기적이고 문명의 위업이다. / 도서관은 모두 정말로 멋지다. 정말 도서관이 서점보다 낫다. 서점은 책을 팔아 수익을 내지만, 도서관은 그냥 자기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순수하게 선의에서 조용히 책을 빌려준다.” 마침내 모리는 어디에 가든 자신이 도서관에 속하리라고 생각한다. 읍내의 작은 도서관이라도 다른 도서관과 연계해서 책을 제공한다.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면 심지어 다른 행성에서도 모리는 소속감을 느낄 것이다. 그곳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공격당해 쌍둥이 자매를 잃고 다리를 절게 된 모리가 다시금 세상과 연결되는 장소다.

저자인 조 월튼 역시 도서관을 사랑한다. 그녀는 ‘도서관의 즐거움’이라는 헌사를 썼다. “모든 책에는, 아무리 사랑받았던 책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므로, 나는 또 다른 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생에 걸쳐 나는 늘 즐거움을 찾아 책을 읽었다. 도서관은 변함없는 친구였다. 내가 열두 살에 처음 모험을 했을 때, 나는 읽어야 할 모든 책이 무료로 꽂힌 책 선반을 발견했다. A부터 Z까지 편리하게 정리된, 좋은 상태의, 새것과 오래된 것, 양장본으로 된 것들을. 내가 사랑한 많은 책을 나중에 소유하게 되긴 했지만, 도서관 독서는 내게 기회를 주었다.” SF와 판타지를 쓴 여러 작가가 도서관에서 기회를 얻었다. 케이트 윌헬름은 가정주부로 지내다 도서관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한나 렌은 어릴 적 시민도서관에서 읽은 SF 문고를 통해 SF를 사랑하게 되었다. 존 스칼지는 도서관에 감사하는 의미로 지역 도서관에 익명으로 기부할 기금을 마련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예 도서관에서 글을 썼다. 『화씨 451』의 작가 후기에는 그가 도서관에서 책을 쓴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당시 나는 1941년부터 쭉 거의 대부분의 집필 활동을 집 차고에서 했다. (…) 아이들은 창가로 떼 지어 몰려와선 노래를 부르거나 창문을 두드려 댔다. 그러면 난 쓰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든지 딸들과 놀아 주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내가 아이들과 놀기로 한다면 가계 수입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별도의 집필 사무실이 필요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 마침내 나는 UCLA 도서관의 지하에서 마침맞은 공간을 찾아냈다. 거기엔 구식 레밍턴 아니면 언더우드 타자기가 20여 개쯤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다임 하나를 내면 30분간 그 타자기를 빌려 쓸 수 있었다. 동전을 넣는 순간부터 시곗바늘은 미친 듯이 째깍거리며 가고, 나는 30분이 차기 전에 글을 마치려고 마구 타자기를 두드려 댔다. 그러니까 당시에 난 이중으로 내몰렸던 셈이다.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집필할 때는 타자기 사용 시간으로부터.”

도서관에 관해 읽다 보면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을 만나게 된다. S. R. 랑가나단은 도서관이 지켜야 할 5가지 대원칙을 발표했다. 강민선의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를 보면 저자는 사서로서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이 책은 실용서가 아니라 에세이다). 현실의 도서관에는 돈 문제, 사내 정치, 소소한 비리, 치사한 노동 환경, 진상 민원이 있다. 그래도 랑가나단이 주장한 5법칙은 매우 자명하고 아름답다.


1법칙. 모든 도서는 이용을 위한 것이다. (Books are for use.)

2법칙. 도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Books are for all.)

3법칙. 도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Every book its reader.)

4법칙. 이용자의 시간을 절약하라. (Save the time of the reader.)

5법칙.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이다. (A library is a growing organism.)


도서관이 자료를 보존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제공하기 위해서다. 언젠가 이루어질 만남을 위해 도서관은 세상의 온갖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고 보관한다. 그것이 도서관이 창고와 다른 점이다. 도서관의 의의는 사람들이 자료를 열람할 때 살아난다. 책은 독자에게 읽힐 때 생명을 얻고, 그런 순간을 위해 도서관은 생동하는 유기체로 존재한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도서관은 예일 대학교에 있는 ‘바이네케 희귀본과 필사본 도서관’이다.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의 소개에 따르면 그곳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직사광선 때문에 자료가 손상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벽면이 무척 얇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낮에는 햇빛이 은근하게 비친다. 저녁에는 반대로 내부 조명이 비쳐 건물 자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은은한 빛으로 어슴푸레하게 유지되는, 종이가 최대한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공간이다. 그런 곳마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누구나 그곳을 구경하고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자신을 열어주는 곳이라니. 도서관은 그야말로 박애의 장소다.

도서관이 당신을 충분히 사랑하면, 당신도 도서관을 사랑하게 될까? 영화 <투모로우>에서 주인공 일행은 해일을 피해 뉴욕 공립 도서관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도서관의 책을 태워 몸을 녹인다. 또한 의학서를 읽고 패혈증을 치료할 방법을 배운다. 사서 한 명은 희귀도서인 구텐베르크 성경을 끌어안으며 이 책 하나만은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책은 인류가 형성해온 문명의 상징이자, 도서관이 지켜온 사랑의 상징이다. 원칙에 따라 도서관은 이용자가 누구든 잘 보존된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무료로 제공한다. 도서관은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보답할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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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완선

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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