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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칼럼] 파란 염료의 해, 육갑 그리고 스타벅스

이소연의 소비냐 존재냐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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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청룡의 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인형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란색 옷을 갈아입고 용 포즈를 취하고, 스타벅스는 부리나케 가장 고급스러운 컬러를 뽑아내어 굿즈를 찍어내는 것 외에, 우리는 다가오는 푸른 용을 어떻게 환대할 수 있을까. (2024.01.12)


기후위기 시대, 소비와 소유를 넘어 존재하는 법을 고민하는
이소연 에디터의 에세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언스플래쉬


“새해 시즌 음료를 시켜봤어!” 푸른색 밀크폼이 얹어진 스타벅스 음료를 조심스레 테이블에 내려두며 친구가 말했다.

“청룡의 해가 뭔데?”

“뭐긴 뭐야. 파란색 용이지.”

“그니까, 파란색 용이 무슨 뜻일까?”

“갑진년? 뭐, 그런 거 아니야?”

누구도 답하지 못해 민망해진 질문은 파란색 색소가 내려앉은 밀크폼 한 모금과 함께 목 아래로 밀어 넣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가장 체감하게 하는 것은 첫눈 아래 깔린 낙엽도, 전깃줄을 붙들다 끝내 머리 위로 톡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도 아닌 단체 카톡방에 “하양이 2개, 빨강이 1개 필요한 사람?”하고 묻는 다정한 안부다. 벌써 프리퀀시 모아 다이어리를 받을 때가 왔구나. 한 해가 또 지나가는구만.

연말이 되면 스타벅스에서는 음료를 주문할 때마다 ‘프리퀀시’라고 불리는 온라인 스티커를 준다. 일반 음료를 마시면 ‘하얀 스티커’를, 비싼 시즌 음료를 마시면 ‘빨간 스티커’를 주는데 이를 총 17장 모으면 다이어리 등 스타벅스 굿즈로 교환할 수 있다. 가장 저렴한 음료 가격으로 계산해 봐도 무려 81,300원을 지출해야 하는 셈이지만, 실물 다이어리를 건네받는 순간에는 선물이라도 받는 듯 기분이 좋다.

자고로 새해의 가장 큰 기쁨은 구김살 하나 없는 종이를 힘주어 펼쳐내고, 지키지도 않을 새해 계획을 아주 치밀하게 고민하고 상세하게 적어두는 것일 테다. 가능성만이 가득한 순백의 종이에는 내가 바라던 생의 순간들을 채워나갈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든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저마다 새로운 다이어리의 비닐을 벗겨내고 야심차게 첫 획을 그으려던 그때, 세찬 바람에 종잇장이 펄럭였다. 뭐야! 매서운 눈으로 출입구 쪽을 노려보자, 누군가 문을 닫지 않고 나가 매서운 칼바람이 매장 안쪽으로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Meet the New year Moment(새해의 순간을 만나보세요). 묵직한 출입문에는 청룡의 해 새해를 축하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마신 밀크폼 음료뿐 아니라 파란색 크림이 얹어진 케이크, 용의 비늘을 흉내 낸 듯한 독특한 모양의 머그잔, 호리호리한 파란 텀블러까지. 과연 굿즈 마케팅으로 매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스타벅스다웠다.

푸른 용을 연상시키는 모든 요소를 활용해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새해 굿즈는, 연말 프리퀀시 다이어리 인기에 이어 올 한해 스타벅스 매출을 견인하며 포문을 열어주리라. 그리고 이내 학익진 전법이라도 펼치듯 벚꽃을 닮은 연분홍 봄 굿즈, 찰랑거리는 파도를 표현한 파란색 여름 굿즈, 고즈넉한 따뜻한 색감을 담은 가을 굿즈와 또다시 돌아오는 연말 다이어리 프리퀀시의 굴레 군단을 내세우며 우리의 한 해를 집어삼킬 것이다. 집 찬장을 뒹굴어 다니는 텀블러를 모른 체 하고 또다시 새로운 시즌의 굿즈 텀블러에 홀린 “와. 예쁘다.”하고 손을 뻗다 보면 우리의 한 해가 또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스타벅스는 할인 혜택으로 텀블러 사용을 독려하고 종이 플라스틱과 생분해 영수증을 사용하며 업계에서 선구적인 태도로 ‘친환경’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해마다 계절마다 새 굿즈들을 내놓는다. 스타벅스 프리퀀시 굿즈는 심지어 직접 구매할 수도 없다. 음료를 수십 잔 마신 후 선착순으로 굿즈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는 오픈런과 리셀, 음료 300잔을 주문한 후 ‘서머 레디백’ 17개와 단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들고 자리를 떠나는 기괴한 소비 행태를 만들어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자며, 가방이며 단 한 번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 없던 그 굿즈들을 서로 가지지 못해 안달이 나게끔 개발하고 판매한다.

육갑. 육십갑자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지지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10천간을 조합해 만든 60개의 간지(干支)를 의미한다. 12지지는 그해의 동물을, 10천간은 그해의 색깔을 의미하며 신년을 맞이하는 의미와 기쁨을 더한다.

올해는 푸른색의 ‘갑’과 용을 의미하는 ‘진’이 만나 갑진년, 청룡의 해가 됐다. 과거 용은 물과 비를 상징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제때 비가 오는 게 가장 중요했기에 청룡의 해에는 새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행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오늘날 청룡의 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인형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란색 옷을 갈아입고 용 포즈를 취하고, 스타벅스는 부리나케 가장 고급스러운 컬러를 뽑아내어 굿즈를 찍어내는 것 외에, 우리는 다가오는 푸른 용을 어떻게 환대할 수 있을까.

“‘육갑하고 있네’하고 욕할 때 육갑은 갑진년 육십갑자의 ‘육갑’이래.” 검색 끝에 청룡의 해의 뜻을 찾은 내가 오묘한 색감의 시즌 음료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뜨뜻미지근하게 식은 푸른색 음료는 커피와 섞여 군데군데 푸르죽죽한 염료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푸른 용이 그저 무언가를 팔기 위해 1, 2월, 아니 그마저도 못한 기간 짧게 쓰이다 을사년 청색 뱀의 꼬리가 되어 사라지지 않길 간절히 염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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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소연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싼 가격에 ‘득템’하는 재미에 푹 빠져 기쁘나 슬프나 옷을 사다, 2019년부터 새 옷을 사지 않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미디어 스타트업 뉴닉에서 3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기후위기, 환경, 포스트팬데믹 뉴노멀에 대한 글을 썼다. 바닷속과 바닷가의 쓰레기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 코리아 활동가가 됐고, 스쿠버다이빙을 통해 바다 깊은 곳에 버려진 폐어구를 수거하는 정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전환 매거진 [바람과물]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릿터] [코스모폴리탄] [1.5도씨매거진] 등 다수의 매체에 기후위기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2019년 아산정책연구원 영펠로로 선발돼 워싱턴에서 미국의 분리배출 및 폐기물 정책 디자인을 연구했고, 2020년 제2회 아야프(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 리서처 펠로십)에서 국내 재활용 정책 및 현황을 연구했다. 그 밖에 스브스뉴스 「뉴띵」, 모비딕 「밀레니얼 연구소」, EBS FM 「전효성의 공존일기」, KBS 라디오 환경의 날 특집 같은 예능·교양 콘텐츠에 출연하거나 환경 교육 및 특강을 진행하는 등 일상적인 방식으로 기후위기, 그린워싱, 패스트패션의 허와 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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