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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가 읽은 그림책]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월간 채널예스>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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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100년 동안 잠만 자던 공주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한 성인 여성 독자에게 깨어 있고 꿈꾸는 공주 이야기를 읽는 일은 얼마나 통쾌한 경험인가.

©반비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뿌리에는 유럽 각지의 민담인 ‘잠자는 미녀’ 설화가 있다. 아름다운 공주가 마법에 걸려 잠이 들자 용감한 왕자가 공주를 깨워 둘이 결혼한다는 내용의 이 동화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로 알려져 있으나, 그 원형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 본위의 에로티시즘이 있다.

‘잠자는 미녀’의 옛 판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기 작자 미상의 기사 소설 『트로일뤼스 기사와 아름다운 젤랑딘 이야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공주가 아닌 기사다. 이야기는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여성의 나체를 탐하는 남성의 세속적 욕망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공주는 수많은 공주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그렇듯 남성 영웅의 트로피로 기능한다. 잠든 채로 겁탈당하고 임신하고 출산한다. 이후 엄마 젖을 찾던 아이에 의해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빠지면서 공주는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윤색을 거치며 17세기까지 이어지다가 샤를 페로의 민담집 『교훈을 곁들인 옛날이야기』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는 제목으로 실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가장 근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윤색의 과정에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다. 서민에서 귀족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독자가 이동하고 확장되면서 겁탈당하던 여성은 순결한 여인으로, 기사 혹은 기혼의 왕이었던 남성은 미혼의 왕자로 변신했다. 다만 수 세기에 걸친 이야기의 풍화에도 공주는 여전히 잠을 잤고 깨어나면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21세기에도 공주 이야기는 다시 쓰인다. 리베카 솔닛은 형편없이 낡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유용하고 의미 있다고 말한다. 다시 쓴 두 편의 공주 이야기 『해방자 신데렐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를 통해 작가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3년의 시간차를 두고 출간된 두 편의 작품을 읽고 나면 공주 이야기의 진화를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 『해방자 신데렐라』가 기존 인물의 관계와 캐릭터를 반전시켜 해방을 이룬다면,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에서는 아예 이야기의 지형을 전복하고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보다 입체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 중심에 ‘마야’가 있다. 저주에 걸려 잠든 공주 ‘아이다’의 동생으로, 깨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야는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부단한 노력 끝에 위대한 화가가 된다. 그에게는 마법 같은 그림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으로 영웅에도 이른다. 마법의 권위가 노력하는 모든 이에게 공평한 보상으로 주어지고, 왕자가 아닌 공주도 자신의 의지로 영웅이 되는 이야기라서, 마야의 아름다움은 남다르다. 그는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함께 나타나는 공주다. 미를 독식하고 칭송받는 대신 모두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든다.


©반비

마야가 성장하는 동안 잠든 아이다는 꿈을 꾼다. 그의 꿈은 타자와 접속하는 매개가 된다. 꿈을 통해 “유니콘이 되어 유니콘이 아는 모든 걸 배”우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 물레를 돌리면서 그들 모두의 삶의 이야기를 자아” 내며, “새들의 언어”“물이 부르는 모든 노래”를 배운다. 100년의 시간은 그렇게 두 공주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저주가 풀려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중창에는 때때로 ‘아돌아왔어’ 왕자와 요정들이 합류한다. 오래된 숲의 나무뿌리가 뒤엉키듯 그렇게 서로의 삶과 이야기가 얽혀나간다.

두 공주의 성장 과정에서 반복되는 메시지 중 하나는 위계의 해체다. 지도자인 여왕에게는 오직 의식적 지위만이 주어지고, 각 여왕에게는 자연법칙에 귀속한 역할이 고르게 배분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아이다에서 마야로, 그리고 ‘아돌아왔어’로 고르게 이동하며 ‘옛날 옛날 한 옛날’에서 ‘옛날 옛날 열한 옛날’로, 나아가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해체된 위계는 다양하고 다중적인 목소리로 이어진다. 아서 래컴의 실루엣 일러스트를 통해 기존의 공주 이야기들이 지니고 있었던 인종과 문화의 색채는 지워지고 온갖 국적의 민담과 풍습들이 곳곳에 등장함으로써 이야기의 장소는 무국적 공간이 된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에 닿는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오직 100년 동안 잠만 자던 공주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한 성인 여성 독자에게 깨어 있고 꿈꾸는 공주 이야기를 읽는 일은 얼마나 통쾌한 경험인가. 여전히 이 시대의 많은 아이들이 옛이야기를 읽는다. 그중 많은 이야기 속의 여성이 여전히 수동적 객체로 남아 있다. 이야기는 언제나 세계를 반영한다. 서술자의 목소리는 종종 독자와 무형의 회로로 접속되며 의식과 무의식 속에 쉽게 흔적을 남긴다.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마법’과 ‘영웅’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정의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다양한 장르에서 보다 주체적인 공주들을 만나게 된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해갈은 요원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손은주의 논문 「‘잠자는 미녀’ 이야기의 시대적 변용」을 참고했다.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리베카 솔닛 글 | 아서 래컴 그림 | 홍한별 역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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