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안에 숨은 인간의 욕망, 씩 데이터(thick data)
『THICK data(씩 데이터)』 백영재 저자 인터뷰
그는 인류학과 비즈니스라는,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두 세계를 오가며 빅 데이터가 의도적으로 외면한 인간의 실제 경험, 진짜 얼굴을 보여 주는 '씩 데이터(thick data)'에 주목했다. (2023.07.19)
예일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지난 20여 년간 맥킨지앤드컴퍼니, CJ,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구글, 한국필립모리스 등 유수의 기업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은 백영재 저자. 그는 인류학과 비즈니스라는,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두 세계를 오가며 빅 데이터가 의도적으로 외면한 인간의 실제 경험, 진짜 얼굴을 보여 주는 '씩 데이터(thick data)'에 주목했다. 인류학적 시각을 기반으로 어떻게 고객으로부터 thick data를 얻었고, 비즈니스 기회로 활용했는지 『Thick data 씩 데이터』에 귀 기울여 보자.
인류학을 전공하셨지만 유수의 글로벌 기업에서 커리어를 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비즈니스 업계에 첫발을 내딛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인류학과 비즈니스라는,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는 두 세계를 오가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인류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대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인류학을 연구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는 것이 쉽지 않게 됐죠.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제가 좋아하는 인류학을 실용적인 분야와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즈니스 컨설팅이라는 분야를 알게 됐고, 맥킨지앤드컴퍼니라는 경영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면서 비즈니스 업계로 첫발을 내딛게 됐습니다.
제가 맥킨지에 입사할 때, 저는 비즈니스 컨설턴트의 역할이 문화 상대주의, 총체론적 접근법, 현지 조사 방법론이라는 3가지 측면에서 '비즈니스 업계에서의 인류학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컨설팅 면접 인터뷰를 진행할 때 이러한 인류학과 비즈니스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면서 맥킨지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컨설팅 회사에서 처음 비즈니스를 접하면서 새롭게 배워야 할 많은 부분이 있었기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실무를 통해 배운 컨설팅은 제가 학계에서 비즈니스 업계로 제 경력을 전환하는 데 정말로 소중한 디딤돌 역할을 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THICK data(씩 데이터)'라는 단어가 낯서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두꺼운 데이터'라는 뜻을 지닌 'thick data'는 사람들의 실제 경험과 행위에 담긴 맥락과 의미를 설명해 주는 데이터를 지칭합니다. big data가 '무엇을 얼마나'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다면, thick data는 무슨 일이 '어떤 맥락에서 왜' 벌어졌는지는 알려줍니다. Thick data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big data와 비교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big data는 정량적(定量的, quantitative) 데이터이고, thick data는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데이터입니다. big data가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에 의존한다면, thick data는 인간 학습에 의존합니다.
이런 차이 덕분에 오히려 big data와 thick data는 서로를 보완할 수 있습니다. 정량적인 정보인 big data로는 '무엇을 얼마나'에 관해 알 수 있고, 정성적인 정보인 thick data로는 '왜, 어떠한 맥락에서'에 대해 통찰할 수 있습니다. 머신 러닝에 의존하는 big data로는 정확성을, 인간 학습에 의존하는 thick data로는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big data가 과거에 벌어진 일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 준다면, thick data는 미래에 있을 일,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이렇듯 big data와 thick data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도, 우월을 가릴 수 있는 개념도 아닙니다. 기업이 소비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big data와 thick data 모두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가 big data는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로, thick data는 주관적이고 믿을 만하지 못한 정보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러한 thick data의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big data로는 왜 사람의 숨은 욕망을 읽어 낼 수 없는 건가요? big data로 사람의 욕망을 읽어 낼 수 없다면 빅 데이터는 가치 없는 정보인가요?
big data는 앞에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정량적인 데이터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정량적인 데이터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읽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어떠한 맥락에서 왜' 그러한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는 자세히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과 깊이 연관된 사람의 욕망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에는 thick data가 더 유용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big data와 thick data는 상호 보완적인 위치에 있지,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Thick data가 '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러한 정보도 big data에 의해서 검증되기 전까지는 좀 더 깊이 있는 가설을 제공할 뿐입니다.
Thick data를 통해서 통찰의 깊이가 있는 가설을 얻어내고, 이를 big data를 통해 검증한 뒤, 실행이 가능한 데이터로 만들어 우리가 얻어낸 가설이 실행 가능한지 파일럿 테스트 할 수 있을 때 smart data가 얻어진다는 것이 이 책의 요점입니다. 물론 한 번에 이러한 실행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테스트가 비즈니스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다시 새로운 가설을 설립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thick data와 big data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파일럿 테스트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긍정적인 비즈니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thick data와 big data는 서로를 보완하는 개념이지 서로 우위를 다투는 개념이 아닙니다.
thick data로 비즈니스 기회를 발견하고 활용한 다양한 사례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가지 사례를 소개해 주세요.
제가 블리자드코리아 대표로 있을 때, 하스스톤이라는 카드 게임을 론칭했습니다. 미국 본사에서는 이 게임을 PC용과 아이패드용으로만 출시할 예정이었으나, 블리자드코리아의 모든 팀원은 이 게임이야말로 블리자드가 스마트폰 버전으로 출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최초로 만든 미국의 본사 직원들은 이 게임이 모바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반면, 저를 포함한 한국에 있는 직원들은 왜 모바일에 적합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미국인들은 보통 자동차로 출퇴근하지만, 한국인들은 버스나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을 사용하기 때문에 모바일폰을 사용하는 빈도와 그 집중도가 훨씬 더 높습니다. 그 결과, 한국 유저들은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거나 게임을 하는 데 훨씬 거부감이 적은 편입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바탕을 둔 thick data를 일상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던 한국 직원들은 하스스톤 게임이 반드시 스마트폰 버전으로 출시돼야 한다고 마이크 모하임 대표에게 강하게 어필했고, 그렇게 탄생하게 된 하스스톤 모바일 게임은 출시일 첫날 iOS 앱스토어에서 1위, 안드로이드 Play스토어에서 2위를 달성하며 한 달 후 국내 매출이 미국 매출의 반을 달성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블리자드 한국 직원들의 thick data에 근거한 의사결정이 큰 비즈니스 결과를 달성하게 된 매우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Thick data 씩 데이터』에서 소개한 thick data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건 인류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즈니스 업계에만 해당되는 걸까요? thick data를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 가능한지, 그리고 일반인들은 thick data 수집을 위해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까요?
제가 이 책에서 5개의 THICK 프레임워크를 만들고 설명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thick data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이 인류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나 THICK 프레임워크의 방법론을 시도해 보고 조금만 노력하면 활용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thick data를 모으고 활용하는 것은 비즈니스 업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된 모든 활동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콘텐츠 업계에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을 위한 리서치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고, 기자분들은 다루고자 하는 기사 내용의 '왜'에 대한 심도 있는 답을 찾기 위해 이용할 수 있으며, 정치권에서는 유권자들의 숨은 의견과 니즈를 찾기 위해 thick data를 모으고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THICK 프레임워크 방법론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합니다.
일반인들이 thick data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① Tolerance : 문화 상대주의에 입각해 낯섦에 관대해지기
② Hidden Desire : 관찰을 통해 소비자의 숨은 욕구 찾기
③ Informants : 극단적인 소비자 및 나만의 자문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④ Context : 소비자의 말이 아닌, 총체적인 맥락에 집중하기
⑤Kindred Spirit : 참여를 통해 소비자에게 공감하기
등의 5가지 방법들을 통해 가능하며,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서 THICK 프레임워크를 설명한 부분을 읽어 보시면 도움될 겁니다.
인류학자들은 자신을 '주변인(marginal man)'으로 규정한다고 책에서 언급하셨는데요. 주변인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주변인의 시선이란 A라는 문화에 속하는 사람이 B문화에 속한 사람의 관점에서 B문화를 주관적으로 보려고 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시선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A문화와 B문화의 주변에 존재하며 A와 B문화를 지속적으로 넘나들면서 주관적인 시각과 객관적인 시각을 '균형 있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여기서 '문화'의 개념을 조금 좁혀서, 서로 다른 '업계'라고 생각해 봅시다. 제가 게임업계에서 수년간 경험을 쌓고 담배업계로 옮겨 두 업계를 모두 잘 이해한 상태에서, 각각의 업계에서 경영의 모범사례들을 다른 업계에 적용해 활용하게 된다면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주변인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변인은 창의적인 생각을 가능케 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책의 서문에서 '비즈니스와 인류학의 만남'을 주제로 한 강연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어떤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게 좋을지, 그리고 어떤 역량을 키우면 좋을지 조언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첫째,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자신의 인문·사회과학 전공 경력을 절대로 부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자신 있게 강조해야 할 사항이지 감춰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자기 경력을 부인하는 순간 자신감은 더욱더 떨어지고 그런 사람을 채용하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자신감의 결여가 훨씬 더 눈에 띄는 법입니다.
둘째, 인문·사회과학 전공 분야와 비즈니스 분야의 연결 고리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맥킨지 입사를 위해 인류학과 비즈니스 컨설팅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정리하는 데에만 3개월 이상 걸렸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각자 해야 하며 그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셋째, 기업에 취업한 후에도 비즈니스 현장에서 인문·사회과학의 효용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 봐야 합니다. 비즈니스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계를 잘 풀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뒷받침될 때 실적으로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인문·사회과학적인 시각이 비즈니스에 의미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면, 비즈니스 업계가 인정해 줄 것이고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 더욱더 귀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길을 미리 만들어 놓은 선배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자신이 그러한 길을 만들기 시작하게 된다면, 진정 자기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남다른 길을 개척하는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백영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컨설턴트는 비즈니스 분야의 인류학자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맥킨지앤드컴퍼니에 입사하면서 비즈니스 세계로 첫발을 내디뎠다. 맥킨지앤드컴퍼니에서 컨설팅 실무를 담당하며 인류학자라서 비즈니스에 훨씬 더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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