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 오디세이를 마치고 - 마지막 화
제10화.(마지막 화) 나폴리에선 그리움조차 파랗다
나폴리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진정으로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나폴리의 시인 리베로 보비오의 말을 떠올린다.
이탈리아 나폴리에 3개월간 머무르게 된 INTJ 소설가는 90일 동안 나폴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격주 화요일 <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가 연재됩니다. |
귀국 전날 나폴리 시내를 걸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이어폰에서는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함께 부른 'Time To Say Goodbye'가 재생되고 있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나는 '22/23 시즌 이탈리아 챔피언 나폴리'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귀국길에 올랐다. 나폴리 시내에서는 우승 기념 티셔츠를 입은 동양인을 보고 열광적으로 반겼지만, 다른 곳은 어떨지 몰랐다.
환승을 위해 로마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공항 직원이 반농담으로 여기는 나폴리가 아닌데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당신 큰일 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나폴리 우승 티셔츠를 입은 나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나갔고,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고는 엄지를 치켜들고 지나갔다.(그가 나폴리 출신이라는 걸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이탈리아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로마 사람들은 나폴리를 싫어해. 밀라노도, 베니스도, 피렌체도 나폴리를 싫어해. 모든 이탈리아 사람은 나폴리를 싫어해."
모두에게 미움받는 나폴리라니, 나폴리에 대한 애정과 함께 세 번째 우승 마크에 더욱 자부심이 느껴졌다.
"넌 대체 잘하는 게 뭐야?"
수년 전, 내가 한때 애정을 바라던 누군가 내게 이런 물음을 던졌고 그게 상처가 됐다. 그것은 나의 능력과 관계되는 물음이었고, 내가 한없이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물음을 받은 것에 상처받으면서도 무력하게, 울음을 참아가며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낭만적인 것 같아."
나폴리에 이방인으로 머물면서 자기소개를 할 일이 많았다. 사람들은 대학 도서관을 매일 들락거리는 나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생도, 교수도 아니라고 하며, 이탈리아어로 소개했다.
"Sono uno scrittore di romanzi(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입니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반복해서 하게 되자,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나의 재능이고, 만질 수 있고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있는 물성을 지닌 세 권의 책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나폴리에서 '네모가 되기를 빌고 빈 세모'를 발표하면서, 내가 스스로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며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항상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내가 그 어느 것도 대표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만에 하나 내가 어떤 것을 대표한다면 그건 외톨이, 아웃사이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진정으로 이방인이라는 옷을 입게 되자 그것이 잘 재단된 맞춤복을 입은 듯 편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환대도 받았다.
3개월간 내가 마신 에스프레소, 내가 먹은 피자, 내가 걸은 걸음이 내 몸을 이루고 변화시켰다. 내가 싸웠던 추위, 내가 마신 매연, 내가 견딘 소음들은 상상이 아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혈관에 토마토와 치즈가 흐르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제 나폴리에서 피자 좀 먹어보고 에스프레소 좀 마셔봤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폴리 체류를 통해 정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돌아간다. 스스로를 운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스스로 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데는 어떤 일들이 벌어져야 할까. 이것은 개인의 노력과 성취만으로는 달성되기 아주 힘든, 귀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내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감각, 개인의 성취감과는 다른, 바로 내게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다. 이는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한국에서는 못 느꼈던 것 같다. 유한한 시간 동안 인연을 나눈 사람들, 감정표현이 큰 이탈리아인들의 표정과 몸짓들. 그저 이방인에게는 친절한 호의를 베푸는 전 세계 공통의 문화일 수도 있겠다. 이제 나도 도움이 필요한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으며, 그런 감각은 체험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고,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폴리 체류는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정말이지 또 해나갈 힘이 없었다. 그것은 번아웃과 휴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는 메아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삶, 내가 보낸 시간이 만들어 낸 마술 같은 응답이었다.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삶을 여행처럼 여기기로 한 내게 실로 변화가 있었다. 나폴리에서 지내던 도중 돌바닥에 휴대폰을 떨어트려 액정이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접착력이 떨어진 휴대폰 그립을 알고도 이용했던 탓이었고, 강화 유리를 붙이지 않고 생폰으로 쓴 탓이었다. 전부 내 탓이었다. 예전 같으면 진절머리 날 정도로 자책을 많이 했을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때 '터치 기능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놀랐다. 오히려 절벽 같은 곳에서 떨어트려 휴대폰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또한 3개월간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덕분에 나폴리에 대한 기억이 훼손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폴리에서 스웨터를 떨어트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렸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노숙인이 주워갔으면 좋겠다고, 잃어버린 게 옷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류의 후반부에는 휴대폰 용량이 가득 차서 사진첩을 정리했다. 웅장한 성당, 미켈란젤로의 작품, 베네치아의 풍경 사진 같은 것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지웠다. 그것들은 내게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고마운 호의들(나폴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쇼핑백, 부활절 초콜릿, 친구가 해준 파스타, 카레와 라면 봉지), 그 사진들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3개월간 나의 작은 오디세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유한한 체류 기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더 관대했고, 점점 더 유한한 삶에 대한 생각을 강하게 했다. 고작 3개월을 머물고 온 내가, 이제 나폴리가 제2의 고향이라고 표현한다면 부끄럽거니와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나폴리는, 이제 나에게 전 세계에서 한국 이외에 가장 큰 의미를 갖는 나라와 도시가 되었다.
나폴리는 베수비오 화산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가 화산재에 덮였던 서기 79년 8월 24일, 북서풍이 불지 않았다면 대도시 나폴리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나폴리는 '재앙을 피해 간 도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매일 베수비오 화산을 보며 나폴리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진정으로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나폴리의 시인 리베로 보비오의 말을 떠올린다.
Tutto è azzurro a Napoli. Anche la malinconia è azzurra.
나폴리에서는 모든 것이 파랗다. 그리움조차도 파랗다.
푸르게 빛나는 나폴리의 바다를 언젠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Grazie Napoli, È un arrivederci, non un addio!
고마워요 나폴리, 영원한 작별이 아닌 잠시 안녕입니다.
*이것으로 <정대건의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 연재를 마칩니다. 지면을 마련해 주신 <채널예스>에 감사드립니다. '집돌이 소설가의 나폴리 체류기'는 아직 출간 계약이 없습니다. 편집자님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daegunjung@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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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장편 소설 『GV 빌런 고태경』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아이 틴더 유』를 출간했다.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