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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의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M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육체의 손상은 팔이나 다리가 없어졌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정신은 중상을 입어도 무엇이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거대한 혼란 뿐이었다. 어쨌거나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 (2023.05.08)
낙심 속에서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 계속 글을 써야하니까, 그러니까 다음 작품을 써야하는 거였다. 모니터의 글씨들이 다시 흔들리고, 등골이 오소소한 공포가 밀려왔다. 노트북 앞에 앉을 때마다 찾아오는 이 지겨운 공포. 나는 무엇을 이다지도 두려워하는가.
공포라면 두려움의 대상이 있을 것이다. 대상을 알아야 극복할 수 있다. 나는 내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 소설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글을 잘 쓰지 못할까 봐, 내가 쓰는 글이 가치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말까 봐 두려워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 두려움이 항시 마음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건 '공포'라고 부를만한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나의 어린 아이가 그것을 다시 마주하느니 차라리 퍼런 강물로 뛰어드는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그것. 내 삶을 차마 똑바로 마주보기도 힘들어 뇌가 굳고 시각이 지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그런 정도의 공포의 근원은 따로 있었다. 형편상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니, 그것을 'M'이라는 대명사로 부르기로 하자. 나의 어린 아이는 M의 공포 속에 자라났고 어떻게 자기한테 그럴 수 있었냐고 분노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으며 인생 망했으니 그냥 뛰어내리는게 낫겠다고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M의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M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율성의 박탈이다. 나 자신의 흥미와 관심사와 욕망을 모두 제거하고 M을 위한 아이로 살게 하는 것. 꼬마는 유치원 선생님이 다함께 춤추자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춤추지 않겠다고 할 만큼 지독하게 자기 세계가 강한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네 생각은 접어두고 M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윽박질렀고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꼬마와 M은 상극이었다. M의 공포는 다시 자유를 빼앗긴 삶의 공포다.
꼬마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인가 M을 위한 일인가? 꼬마는 그 문제에 집요하게 의심이 많았고, 어떤 일리 있는 설명에도 결코 수긍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가 좋은 성적을 올리고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M의 기쁨을 위한 일이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면, 그것은 내가 결정한 방식대로 진행 되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M을 위한 것이므로 M의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나와 M의 방식이 충돌하면 M의 방식을 따랐다. 그것은 M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었다. 더이상 M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범생이로 살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꼬마에게 글을 쓰는 이 일이 M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나의 일일 뿐이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글을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럽고 많은 좌절이 따른다. 오랜 시간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다른 즐거움들이 많다. 하필이면 책상에 앉아 괴로워하는 그 모양새가 꼬마가 극혐하는 M의 세계를 닮았다. 꼬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대단한 오해에 빠졌다. 괴로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것은 M이 강요했던 그 세계가 아닌가? 어찌하여 우리는 다시 M 월드에 돌아왔는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단단히 결심했을 텐데? 다시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휴대폰이나 친구들 같은 재미있는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 일을 나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M의 세계에 돌아가느니 차라리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버리는 것이 낫다.
심지어 꼬마는 더 큰 오해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 꼬마는 세상의 모든 노력과 성취를 M의 지령으로 여겼다. 내가 노력하고 성취하면 M이 기뻐할 것이다. M을 기쁘고 강하게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노력하고 성공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M이 옳았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꼴이 된다. M은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거 봐라.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되잖니. 이건 모두 너를 위한 일이었다."
나는 M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나를 잃고 서서히 M이 되어갈 것이다. 거울 속에서 M을 발견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M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된다. 나는 실패하고 멸망해야 한다. 그래야 M이 옳지 않았음을 똑똑히 드러낼 수 있다. 꼬마는 정확하게 그 길을 가고자 했다. 소멸함으로서 M을 파괴하는 길. 꼬마는 승리를 선언하며 용광로에 뛰어드는 터미네이터와 같다.
M의 세계관으로 보자면 나는 M의 영광과 승리를 드러내기 위해 복무하는 존재다. 대체로 나의 영광과 M의 영광은 함께 갔다. 내가 승리하면 M도 함께 승리하는 식이었으므로, 우리는 이런저런 승리들을 거두는 것으로 내재된 불화를 무마하고 그럭저럭 화목하게 지냈다. 하지만 나의 꼬마가 이러느니 죽는게 낫겠다고 마포대교에 매달리자 M과 나의 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M은 저 철딱서니 없는 것을 당장 정신 들게 혼구멍을 내서 이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승리의 길을 걷게 하라고 호령했다. 꼬마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M인가 꼬마인가. 나는 그 갈림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M의 영광도 꼬마의 파멸도 아닌, 나의 자유를 찾아가는 길. 이것은 이전까지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내 앞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안개 속의 한걸음을 내딛자 발밑이 허물어지고 끝도 없는 허공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만났던 난기류, 몸이 불규칙하게 뚝뚝 떨어지는 그 느낌은 노트북 앞에 앉아 M의 영광에 복무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자 할 때 느꼈던 그 기분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설이』를 완성한 것은 M에게 날린 중요한 한 방이었다.
나는 소설이라는 글러브를 끼고 링에 올랐다. 상대방은 M이었다. 『설이』의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 M의 거짓됨과 어리석음을 조목조목 따졌다. 죽도록 맞으면서도 10라운드까지 KO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골이 콧구멍으로 쏟아져나올 만큼 얻어터졌지만, 어쨌거나 게임이 종료되었을 때 나는 쓰러지지 않고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M의 꼴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회복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나는 M에게 중요한 한방을 날렸고, M은 나보다 더 비참한 지경이 되어 링에서 실려 내려갔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된 게 아니었다. 나는 여기저기 부러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도 안 보이고 뇌는 굳어버렸고 1초도 집중할 수 없었다. 노트북 앞에 앉기가 전기의자에 앉는 것만큼 두려웠다.
나는 더 이상 무력한 꼬마가 아니었으므로 M은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깃든 악령 같은 것이었는데, "너 하는게 다 그렇지"라고 빈정거리거나 그 따위로 하려면 다 집어치우라고 악을 쓰는 식으로 나에게 작용했다. 『설이』를 쓰기 전에는 고막이 터지도록 큰 소리였는데, 설이 이후로는 불쾌하게 중얼거리는 정도로 볼륨이 줄어들었다. 나도 멍투성이였지만 저쪽의 기세가 달라진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이 밝아지면 목소리가 더 줄어서 옹알이만큼 작아졌다가, 내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기가 살아서 다시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 자식 봐라.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네. 나는 비통한 속에서도 이건 꽤나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악령이 강약약강이라니 그 비열한 본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한편, 그가 우주를 덮을 만큼 강한 존재는 아니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쨌거나 악령이 하는 말들은 여전히 나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그 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시작하면 나는 무언가를 써볼 용기나 의욕을 깡그리 잃었는데, 어느 날 그 말들을 요약하면 결국 '쓰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M이 원하는게 결국 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쓰러지는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꼬마의 또다른 반항심이 치솟았다. 꼬마는 이렇게나 이중적인 존재다. 억울하니 죽어버린다고 하다가 다음 순간 억울해서 뭐라도 쓰고 죽어야 한다고 했다. 아주 종잡을 수 없이 날뛰었다.
혼란이 극에 달한 무렵 나는 서점에도 가지 못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빼곡하게 쌓인 책들을 보면 그것이 나를 덮쳐 매몰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우리 집은 광화문의 대형 서점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인데, 그곳에서 책을 사야할 일이 있으면 바로 책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이용해 1분 만에 빠져나왔다. 물론, 책이 있는 쪽 통로가 아니라 문방구와 팬시 용품이 있는 통로를 이용한다. 요새 새로 나온 책이 뭐가 있나 이것저것 들춰보는 취미 생활은 끝장 난지 오래였다. 서점은커녕 우리집 서재도 무서워서 못 들어갔다. 책이 가득한 책꽂이는 호랑이의 곶감처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설이』를 완성한 이후 나는 M과의 투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스스로 판정을 내렸고 회복이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동화같이 풀리지 않았다. 짧은 휴식을 거쳐 다음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자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춤추는 글자들을 다시 마주했다. 『설이』가 M에게 정면으로 거역하고 반박하는 소설이었다면 새로 쓰려 하는 『영원한 유산』은 M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었다. 그런데도 글씨가 춤을 추었다. 기대했던 회복은 터무니없이 멀었고, 내가 겪은 일이 말하자면 상당히 중한 정도의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는 쓰라린 깨달음이 찾아왔다. 골절인 줄 알았는데 절단이었다. 육체의 손상은 팔이나 다리가 없어졌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정신은 중상을 입어도 무엇이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거대한 혼란 뿐이었다. 어쨌거나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부터, 없어진 그것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대책을 세우는 일까지 할 일들이 까마득했다. 무엇보다도, 파악도 되지 않고 대책도 세우지 못한 오늘 내일 모레, 그 뒤로도 끝없이 이어질 하루하루를 당장 살아내야 했다. 이게 모두 나의 일들이라니 아득하게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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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영원한 유산』, 『설이』 등과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