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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제주행을 결정한 이유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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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든 지금과 다르게 변화해보자는 의지만은 충만한, 우리의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2023.04.03)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을 연재합니다.
6개월 육아 휴직을 낸 아빠 아나운서 전종환이 제주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부부는 범민이가 학생이 되기 전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사교육으로부터의 도피인지 유예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게 무엇이든 지금과 다르게 변화해보자는 의지만은 충만한, 우리의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올해로 일곱 살이 된 아들 범민은 여섯 살 되던 해에 영어유치원,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어학원에 입학했다. 어학원에서는 아이가 하루 다섯 시간 온전히 영어에만 노출되기 때문에 학습 효과가 극대화 될 거라 설명해줬다. 이 말만 듣고 범민의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 것이라 믿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비교적 일찍 알파벳을 읽고 가끔은 간단한 의사소통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며 나름의 효율성을 느낀 적도 있었다.

고백하자면 아내와 나는 사교육 무용론자였다. 우리는 의욕 없는 학원 수업의 무의미함을 학창 시절 경험으로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멍하게 앉아 학원 선생님의 유머만을 기다렸던 그 쓸모없던 시간들. 하지만 부모가 된 우리의 마음은 작은 봄바람에도 흔들리는 제주의 유채꽃처럼 시시각각 변해갔다.

제일 처음 나의 마음을 흔든 건 영어어학원을 다녔다는 아이들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이었다. 일곱 살 아이가 영어로 말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공교육 10년 공부에 영어권 국가 체류 경험까지 있는 마흔 넷 나보다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솔직히 멋져보였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 아이도 혹시 가능한 건가?"라는 기대감이 살포시 떠올랐다. 열혈 육아 선배들의 조언도 한 몫 했다. "보낼 수 있는 데 안 보낼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와 같은 합리적 조언도 있었고 "나중에 아이가 왜 안 시켜줬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처럼 은근히 공포를 조장하던 말도 기억에 남는다. 결국 우리 부부의 마음은 "조금 무리하더라도 안 보내는 것보다는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는가?"로 정리됐다. 그렇게 범민은 하루 다섯 시간을 온전히 영어에 노출되는 세상으로 내던져졌다.

그날은 범민이 영어어학원에 입학한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어학원에서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공개 수업을 준비했고 범민은 어느 때보다 들떠있었다. 관종끼가 다분한 범민은 좋아하는 엄마와 할머니 앞에서 멋지게 발표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범민은 온갖 재롱을 떨며 자신의 공간인 어학원에 들어선 엄마와 할머니를 환영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나이든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에 모두 깨닫게 된 것처럼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범민의 바람과 달리 수업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됐던 것이다. 원어민 선생님의 질문에 다른 아이들은 너도 나도 손을 들고 답하려 했지만 단 한 명, 범민은 그러지 못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아내는 범민만이 선생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범민은 점차 의기소침해졌고 남은 수업 시간 동안 멍한 눈빛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기력과 절망. 자신을 지탱하던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알파벳조차 몰랐던 나는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버스를 몇 번 갈아탄 끝에 영어 수업이 열리는 강의실로 들어섰다. 미국에서 만든 비디오 영어 교재를 산 사람들에게 원어민 수업의 기회를 제공했던 걸로 기억한다. 영어를 해본 적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짐짓 모른 체 하면서라도 나는 잘 해내고 싶었다. 반에서 공부를 제법 잘하는 편이었고 강의실 뒤에는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수업이 시작됐다. 외국인 선생님이 뭐라 뭐라 말하는데 내가 알아들을 방도는 없었다.

내 바람은 오직 하나였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수업이 끝나주기를... 하지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답해줄 학생을 찾던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Hi. can you repeat this sentence please. ok?"

아마도 이런 종류의 질문이었을 것이다.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엄마를 포함한 모든 이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기 때문이다. 나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알아듣지 못했던 앞 문장은 대강 뭉개고 내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 하나만이라도 크게 말해보기로 했다. 나는 목청 높여 대답했다.

"하이... 캐엔 으으으 응으으... 오케이!!!?"

순간, 기다렸다는 듯 강의실에 있던 부모와 아이들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 이제와 보면 재미있고 사소한 별 것 아닌 일로 여겨지지만 당시 나는 정말로 심각하게 쪽팔렸고, 그래서 완벽하게 무너졌다. 그날만큼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의기소침한 열한 살 아이였다.

그리고 범민 역시 아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범민에게 다가가 말했다고 한다.

"범민아. 많이 힘들었지? 범민이가 수업을 잘 할 수 있게 엄마가 도와줬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했네. 엄마가 미안해."

범민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응... 엄마. 사실... 나 힘들었어."

아내는 학원에서 나와 범민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과 장난감을 사줬다. 그럼에도 범민의 표정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뒤, 아내는 범민을 영어어학원에서 빼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아내의 과감한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우리는 제주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제주에서 살 집을 알아봤다.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이 기간만큼은 범민을 사교육에 맡기지 말자는 게 우리의 유일한 목표였다. 우리는 범민이 학생이 되기 전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사교육으로부터의 도피인지 유예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게 무엇이든 지금과 다르게 변화해보자는 의지만은 충만한, 우리의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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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전종환(아나운서)

MBC 아나운서.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을 썼다.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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