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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술 맛 멋] 강쇠와 옹녀의 기운이 서린 한 잔

5화 : 지리산 기운 내린 강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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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식힌 강쇠를 와인 디켄터에 옮겨 담은 뒤 와인잔에 따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보았다. 와인잔의 내벽을 타고 올라오는 술의 향이 한층 강렬해지며 더욱 다채로운 맛이 느껴졌다. (2023.04.04)


소설가 김혜나가 전통주를 음미하며,
소설가의 일상, 술의 향과 맛, 시와 소설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우리 술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는 청주, 약주, 정종, 사케 등이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청하'라는 술이 '정종'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고, '정종'이 곧 '차례주'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 술을 즐겨 마시게 된 후에 이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청주(淸酒)'란 말 그대로 탁주 위에 떠오르는 '맑은 술'이라는 것. 다만, 일제 강점기에는 오직 일본식 입국(粒麴)을 사용해 빚은 술만 '청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우리나라의 청주는 주세법상 '약주(藥酒)'로 분류되었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이에 반감을 가진 이들은 우리의 맑은 술을 '약주' 대신 '청주'라고만 부르기도 하고, 주세법의 주종 분류가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한국의 맑은 술은 글자 그대로 '청주'로 부르는 게 마땅하지 싶다. 그리고 일본식 '청주'를 일본어로 발음한 '세슈'라고 부른다면 주종 명칭에 대한 혼동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 까닭이다. 

일본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케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식 주점만 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한데 한국의 청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백화수복'과 '청하'뿐이었다. 식당이나 마트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술이다 보니 한국식 청주란 오직 이 두 가지가 다인 줄 알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많은 맑은 술, 즉 주세법상 '약주'가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기야, 약주란 탁주에 용수1)를 박아 위로 뜬 맑은 술만 걸러낸 것이니 탁주의 종류만큼이나 약주의 종류도 많을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전통주 읽어주는 여자'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이현주 소믈리에의 책 『한잔 술, 한국의 맛』에는 전통 증류주와 약주, 탁주, 과실주까지 다양한 한국 술이 소개되어 있다. 술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함께 그에 얽힌 이야기가 어찌나 맛깔나게 쓰여 있는지, 읽는 내내 책에 소개된 술을 다 한 번씩 맛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참느라 괴로울 지경이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술의 종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데 단순히 가짓수로만 많은 술을 알게 된 게 아니라, '약주'라는 주종 자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스무 살 이후 술자리에서 "소주 마실래, 맥주 마실래?"라는 질문을 숱하게 받았고, 소주와 맥주가 아니라면 와인, 막걸리, 위스키 정도의 술을 언급할 뿐이었다. 한데 약주라니, 약주란 그냥 '술'을 점잖게 이르는 말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의 3분의 1가량이 약주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어 적이 놀랐다.

책에 소개된 다양한 약주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마셔본 청주와 약주를 돌이켜 보았다. 앞서도 언급한 백화수복과 청하 외에도 2000년대에 큰 돌풍을 일으킨 백세주, 산사춘, 가시오가피주가 있었다. 희석식 소주와 국산 맥주만큼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살균약주도 제법 즐겨 마셨다. 다만 가성비 면에서 언제나 초록병 소주가 우위에 있었을 뿐이다.

나는 우선 온라인 전통주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약주를 살펴보았다. 약주를 본격적으로 마셔보고 싶어 살펴보던 와중에 가장 먼저 제외한 술이 사실 '지리산 기운 내린 강쇠'였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껏 마셔온 살균약주만큼 저렴한 이 술의 품질을 신뢰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한데 그 저렴한 가격 때문에 무료 배송 기준에 맞추려고 한 병을 끼워 넣게 됐다. 비싸 봐야 2천6백 원 정도이니, 마셔보고 별로다 싶으면 요리술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끼워' 마시게 된 강쇠 약주를 잔에 따랐다. 전에 마셔본 살균약주에 비해 색이 연하고 점도가 낮았다. 다소 쿰쿰한 누룩 향이 올라오지만 일단 입에 넣으면 매우 싱그럽고 부드럽게 술술 넘어가는 게 신기했다. 술잔을 흔들어 몇 잔 더 마시자 나도 모르게 "드디어 찾았다, 내 인생 술"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너무 달거나 진득하지 않으며 가볍고 청량하게 혀를 타고 넘어가는 목넘김이란! 과도한 알코올 향이나 누룩취, 살균취 등 무엇 하나 튀는 것 없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어 편안하게 술술 마실 수 있었다. 드디어 내 취향을 저격하는 약주를 찾았다는 사실이 반갑고, 이런 술이 극도로 저렴하다는 사실이 두 번 반가웠다.

이 술의 제품명은 누가 봐도 남성적이지만, 술의 색, 향, 맛에 있어서는 다소 여성적인 느낌이 났다. 은은한 단맛에 가볍고 부드러운 목넘김. 녹차처럼 옅은 빛깔이 나에게는 살결이 희고 몸이 가녀린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원재료를 보면 오가피는 남성의 정력에 좋다는 설이 있어 넣은 듯하고, 오미자는 여성의 피부에 좋다는 설이 있어 음양의 구색을 맞추려고 사용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 홀로 이 술에 대한 의미를 더듬어나가다 보니 어쩌면 제품명과 가격대, 술병 디자인의 모티브를 <변강쇠가>에서 얻은 게 아닐까 싶었다.

<변강쇠가>는 조선 후기 사회 빈곤층의 절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평안도의 옹녀와 삼남(三南)의 변강쇠가 청석골에서 만나 떠돌다가 지리산에 정착한다는 내용이다. 유별나게 정력이 강한 그들은 조선 팔도를 떠돌며 살아가는 빈민층이었다. 하루는 강쇠가 땔감을 하지 않고 장승을 뽑아 불을 때자 장승이 강쇠에게 무자비한 형벌을 내렸다. 그로 인해 강쇠는 비참하게 죽고, 자신의 죽음을 원통해한 강쇠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무당이 굿을 벌여 해원(解寃)을 한다.

차갑게 식힌 강쇠를 와인 디켄터에 옮겨 담은 뒤 와인잔에 따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보았다. 와인잔의 내벽을 타고 올라오는 술의 향이 한층 강렬해지며 더욱 다채로운 맛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술의 외양은 천하의 잡놈이던 강쇠 혹은 그가 패다가 징벌을 받게 된 장승의 모습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안에 담긴 술은 고운 미색을 자랑하는 옹녀의 결과 닮아 있어, 둘의 조화 또한 나름의 의미를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강쇠는 많은 이들이 한 잔 술과 함께 강쇠의 넋을 기억할 수 있도록 보다 대중적이고 저렴하게 만든 술이 아닐까 싶다. 그 마음 조심스레 다루고 싶어 둥글고 투명한 와인잔에 두고 한 모금 한 모금씩 천천히 들이마셨다.



1)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 술이나 장을 거르는 데 쓴다.



한잔 술, 한국의 맛
한잔 술, 한국의 맛
이현주 저
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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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혜나(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제리』로 제3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청귤』, 중편 소설 『그랑 주떼』, 장편 소설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이 있다. 제4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인도 마이소르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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