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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술 맛 멋] 시인의 마을에서 향수를 읽다

3화 : 막걸리 '향수'와 '시인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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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정성들여 밀을 빻고, 누룩을 띄우고, 쌀을 씻고, 고두밥을 쪄서 매일 저어주며 빚은 탁주가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내 입맛이나 취향에는 쌀막걸리인 '시인의 마을'이 더 잘 맞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난 뒤 그 맛이 내내 떠오르고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술은 '향수'였다. (2023.03.07)


소설가 김혜나가 전통주를 음미하며,
소설가의 일상, 술의 향과 맛, 시와 소설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향수'는 이원양조장에서 생산하는 대표적인 밀막걸리다. '향수'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보나마나 충북 옥천에 있는 양조장에서 생산하겠지, 라고 예상했고, 나의 추측이 맞았을 때도 딱히 놀랍지 않았다. '향수' 하면 정지용이고 정지용 하면 옥천이니, 만약에 옥천이 아닌 다른 지역의 양조장에서 '향수'라는 이름의 막걸리를 생산한다면 그게 더 놀랄 일 아닐까 싶었다.

문학을 꿈꾸던 학부생 시절, 옥천에서 열리는 지용제에 다녀온 적이 있다. 지용제는 시인 정지용의 작품 세계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데, 나로서는 너무 오래전에 참여한 터라 그곳에서 어떤 행사를 진행했는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시가 교과서에 실리고 가곡으로 만들어져 불리기까지 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문인의 생가가 너무도 작고 누추해 충격을 받은 기억만 또렷이 남아 있다. 지용은 당시 서울 휘문고와 일본 도시샤대학교에서 수학했으니 제법 명망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시인의 실상은 이토록 비루하였나 싶어 입맛이 썼다. 그의 대표작 「향수」에 묘사된 실개천의 모습도 생각보다 초라하여, 시인이 살아온 현실이 더욱 가슴 아리던 기억도 떠올랐다.

지용제가 마무리될 무렵, 참가자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 잔치라는 것도 소박하기 그지없어, 묽게 부쳐낸 부추전에 지역 탁주를 한 통씩 돌리는 게 다였다. 그때 나는 탁주에 취한 건지, '시인의 마을'에 취한 건지, 나도 모르는 새 얼근하게 취해 아롱아롱 세상을 바라보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나 싶다.

술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원양조장의 '향수'는 전통주 교육 기관에서 시음주로 다루고 소셜 미디어 피드에도 자주 올라오는 술이다. 워낙에 인기 있는 술이라 꼭 한번 맛보고 싶기는 했다만, 술의 원재료가 밀이라서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아무리 좋은 탁주라도 곡향이 강한 술을 마시기 어려워하는 나는 이곳에서 생산하는 쌀막걸리 '시인의 마을'을 먼저 마셔보는 게 나을 성싶었다.



'시인의 마을'은 700밀리리터 용량의 작고 뭉툭한 병에 담겨 있다. 병이 생각보다 크고 두꺼워 굉장히 묵직한 느낌이다. 차게 해서 흔들어 마시라는 문구를 따라 뚜껑을 연 뒤 잔에 따르고 나니, 병 주둥이에서 기포가 올라와 흘러넘쳤다. 탁도가 높은 꾸덕한 질감의 탁주인데도 마시는 내내 탄산이 살아있는 게 놀라웠다.

술잔에서 쌀막걸리 특유의 새콤하면서도 쿰쿰한 향이 올라온다 한 모금 입에 넣으니 '진짜 잘 만든 탁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이어 맛볼수록 세상에 이렇게 우직하고 정직하게 만들어낸 탁주가 또 있을까 싶었다.

'시인의 마을'은 당도와 산도가 아주 높지 않으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탄산 또한 과하게 치솟는 게 아니라, 적당하게 뽀글뽀글 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탁주 위로 뜬 개구리알 같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에탄올 함량이 10도나 되는데도 알코올의 독한 향이나 맛은 크게 느껴지지 않고, 쌀을 잘 발효하고 숙성해 본연의 맛을 제대로 이끌어낸 술이었다. 놀랍도록 정직하고 우직해서, 정말로 착하고 소박해서 마음 깊이 와닿는 쌀막걸리라 칭할 만했다.

'시인의 마을'을 맛보고 난 뒤 곧바로 '향수'를 주문했다. 이렇게 술을 잘 빚는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라면 취향이 아니더라도 일단 맛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향수' 또한 '시인의 마을'만큼 꾸덕한 질감에 탄산이 살아있었다. 색깔만 보면 구수한 누룽지 사탕이나 달달한 미숫가루가 떠오르는데, 막상 그런 종류의 인공적인 단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한 달달함과 탄산, 그리고 곡향이 어우러져 있고 꾸덕할 정도로 높은 탁도가 이 모든 요소를 묵직하게 이끌어주었다.

시중에 수많은 프리미엄 막걸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향수'만큼 '프리미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술은 흔치 않아 보였다.

어머니가 정성들여 밀을 빻고, 누룩을 띄우고, 쌀을 씻고, 고두밥을 쪄서 매일 저어주며 빚은 탁주가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내 입맛이나 취향에는 쌀막걸리인 '시인의 마을'이 더 잘 맞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난 뒤 그 맛이 내내 떠오르고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술은 '향수'였다. 킁킁거리며 그 아련한 향을 잔뜩 맡은 뒤, 한 모금 들이켜면 입 안 가득 차오르는 고향의 맛. 어쩌면 술맛 또한 제품명을 따라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랜 향수가 남았다.

청록파 시인들과 윤동주, 이상 등 당대 유명 시인을 발굴하여 등단시키고,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남긴 시인 정지용. 안타깝게도 한국 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해지고 사망 원인조차 불분명하여, 그에 대한 향수가 더욱 저리듯 다가왔다. 향수 가득 머금은 '시인의 마을'과 시인의 마음을 그려보고 싶으나, 시 쓰는 재주를 타고나지 못해 그저 지용의 시 한 구절 더 읊어보았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_정지용, 「고향」



향수
향수
정지용 저
애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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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혜나(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제리』로 제3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청귤』, 중편 소설 『그랑 주떼』, 장편 소설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이 있다. 제4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인도 마이소르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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