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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의 식물로 맺어진 세계] 한 척의 범선, 한 척의 정원
식물로 맺어진 세계 2화
식물이 빛과 바람과 물을 거느릴 때 완성하는 아름다움은 우리의 둔탁해진 오감을 한 꺼풀 벗겨낸다. (2023.03.29)
한때는 글이, 독방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몰 중인 자의 등짝에서 지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공간의) 폐쇄만이 고독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하지만 방문을 걸어 잠글 때 생각의 창문도 함께 닫히는 느낌은... 아무래도 나의 필력, 근력, 지구력, 집중력 등이 모자란 탓이겠지만, 아무튼 나는 주기적으로 방문을 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밖에서 고독을 사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정한 나의 가족들은 나의 마감 상황이 늘 궁금하고, 함께 간식을 나누어 먹고 싶어 하고, TV를 보며 함께 깔깔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감이 다가올수록 나의 결함을 어디에든 뒤집어씌우고 싶은 충동이 거세진다. 그럴 때 나는 누구와도 눈 맞추지 않고 빠르게 발코니로 향한다.
이탈리아의 근대 건축가인 지오 폰티는 『건축예찬』에서 발코니를 '한 척의 범선'이라고 비유했다. "건물의 정면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라며, "언제라도 항해를 떠날 수 있다"고 했는데, 자칫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 비유에는 발코니의 건축적 정의가 담겨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건물의 외벽에 부가적으로 매달려 있는 공간, 외부와 내부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전망과 휴식의 목적을 갖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한국에서는 베란다와 혼동되어 사용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베란다는 건축물의 상층이 하층보다 작게 건축되어 남는 아래층의 지붕 부분을 의미하는 용어라, 흔히 우리가 일컫는 베란다는 사실 실내화된 발코니에 가깝다) 개념이나 정의는 대게 지루하지만 건축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는 이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체감해온 어떤 공간에 대한 감각이 공중에서 부유하다 어느 날 우연히 이론이라는 토양에 안착했을 때이다.
어쨌든 발코니를 '한 척의 범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내게도 있다. 한 척의 범선. 아니 한 척의 정원. 어린 시절 우리집 발코니는 조금 특별했다. 전적으로 아빠의 손으로 조성된 '아발코니'였다. 아빠는 난 수집가이기도 했는데, 내 눈에는 똑같이 생긴 풀떼기 집단에 불과했지만, 저마다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었고, 화분의 화려함 정도나 아빠가 분촉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는지에 따라 풀떼기 사이에도 마치 계급이 있어보였다. 난 화분의 행렬 끝에는 돌 수반이 하나 있었는데 꽤 그럴싸했다. 양쪽에서 높이가 다른 두 폭포가 흐르고, 물레방아가 돌며, 옆에는 초가집이, 또 그 옆에는 풍란이 심겨져 있었다.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어항에는 작게 피어오르는 분수 아래로 물고기들과 가재, 거북이, 우렁이, 다슬기와 같은 각종 수중 생물이 살았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쪼그려 앉아 어항 안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면 곡선의 짙은 초록 잎들이 바다의 윤슬처럼 살랑거리며 반짝였다. 아빠가 화분에 물을 주고 난 아침에는 축축하고 비릿한 공기 냄새가 났다. 빛과 바람과 물은 식물의 기본적인 생육 조건이기만 할리 없다. 식물이 빛과 바람과 물을 거느릴 때 완성하는 아름다움은 우리의 둔탁해진 오감을 한 꺼풀 벗겨낸다.
그 작고 아름다운 정원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기도 했다. IMF 경제 위기였다. 십년쯤 지나 발코니를 다시 갖게 되었을 때, 아빠는 또다시 돌 수반을 가져다 놓았고, 난 대신 동백나무와 찔레꽃, 국화 등을 화분에 심었다. 나는 돌 수반을 십년 전보다 작게 느낄 만큼 컸고, 아빠는 관엽 식물보다 꽃을 더 좋아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아무튼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한 척의 정원에 다시 탑승할 수 있게 되었고, 어릴 적보다 훨씬 긴 시간의 표면을 떠다니게 되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푸드덕 날아가는 새를 따라서, 수조에 비친 선명한 얼굴에서 두 눈알을 뽑아다 밤의 창 너머 희미한 얼굴에 붙여주면서, 낮에 들어오는 햇살로부터 갓 탄생한 먼지에 가위를 들이대면서, 돌 밑에 숨어있는 물고기들의 언어를 탐색하면서. 여기 바닥에 떨어진 동백의 빨간 꽃잎을 주우면 돛이 펼쳐지고, 내부와 외부의 자장에서 벗어나 한 척의 작은 정원이 항해한다. 단, 등 뒤에서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쯧쯧. 아직도 마감이 안 끝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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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다.
지오 폰티 저/김원 역15,000원(0%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