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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광고 대행사 직원이 본 드라마 - <대행사>
1화 - 드라마 <대행사>
대행사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왜 이 드라마의 배경이 대행사여야 했는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대행(代行), 문자 그대로 '남을 대신하여 행함'이라는 의미에서 탄생한 배경이 아니었을까. 일은 대신할 수 있어도, 남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 (2023.03.07)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
광고 대행사로 출근한 지 10년째. 매번 똑같던 출근길 왼편의 공사장 가벽을 따라 무언가 줄줄이 붙어 있었다. 드라마 <대행사> 방영을 예고하는 포스터였다. 대행사 출근길에 붙은 <대행사> 포스터라니, 참으로 적절한 광고 집행 현장이로구나! 누구보다 광고에 취약한 광고인인 나는 궁금했다. 제목만 봐도 속이 쓰려지는 이 드라마, 과연 어떨까?
실제로 보니 더 쓰렸다. 주인공 고아인(이보영)이 저녁 식사로 물컵에 소주를 3병이나 따라 마시고,(심지어 냉장고에 있는 것이라곤 물과 소주뿐이다) 그렇게 마시고도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며, 자리에 앉아 입에 담배를 문 채 연필을 줄기차게 깎기 때문... 만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스타일리시하며 일까지 잘한다는 설정의 여성이, 입만 열면 사람의 속을 다 뒤집어 놓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마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 시절의 여성 캐릭터처럼.
실력 좋고 성과 낼 줄 안다고 해서 막말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건 결코 아닌데, 시도때도 없이 남들에게 호통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절로 괴로워졌다. 누구보다 일을 잘한다는 주인공이 제대로 된 피드백도 없이 최소한의 수정 방향성도 주지 않은 채 팀원들에게 "다시"라는 말만 반복할 때, 광고를 사랑한다는 주인공이 "그렇게 일할 거면 과자 광고 만드는 대행사나 가"라고 외쳤을 때(특히 이 장면은 예산에 따라 대행사 직원들이 일을 차별할 거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모든 프로젝트는 똑같은 일이며 광고에 대한 사랑 앞에 평등합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러웠다. 지금은 2023년이며, 이런 사람도 대행사도 없을 것이라고 동네방네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끝나 화면이 까맣게 물들면, 내가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 세상의 일부를 본 것만 같아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현실이 더하다는 말은 언제나 유효하니까. 언젠가 어디선가에선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며, 내가 모르는 곳에선 여전히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내 주변의 동료들이 이 드라마가 "마치 10년 전 같다"는 말을 했을 때, 내 마음 한구석은 더 서늘해졌다. '구시대적'이란 표현을 쓸 수 있게 된 현재의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부채감일 수도 있겠다. 여성 임원의 존재가 '최초'가 아니게 된 지금, 다양한 곳에서 최초의 자리를 얻어내기 위한 여성들의 고군분투를 나는 결코 오롯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고아인이 미웠다. 그가 마치 여성의 대표로서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보다 그가 처한 세상을 더 미워하지 못하는 나도 미웠다. 그래서 슬펐다. 동시에 그가 이름 앞에 붙은 성처럼 'GO'하길 간절히 기원했다. 이 드라마는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지방대 출신의 여성이 '질서니 관습이니 하는 거 싹 다 쌩까고 그냥 고'하는 걸, 그렇게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는 이야기니까. 하얗고 까만 정장 일색의 남자들 틈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붉은 색의 정장을 입은 고아인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건, 여성의 몸으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에겐 필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드라마 방영 동안 현직자가 본 드라마 <대행사>가 어떤지 물어보는 질문이 많았다. 그에 관해서라면 할 말은 무수히 많아지지만, 이 드라마가 가지는 가치는 현재의 대행사를 고증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시청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VC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되기까지 고달팠던 고아인의 여정과, 그것을 달성하고서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든 그 뒤의 여성들이다.
고아인의 뒤에는 '돈벌어다 주면서 죄인 취급' 받았으나 끝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워킹맘 조은정, 옷차림보다는 일에 집중하는 능력자 배원희, 대립하면서 함께 성장한 강한나, 끝까지 의리를 지킨 비서 정수정, 고아인을 지지하기 위해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이름 모를 팀원들이 있다. 어느 때보다 탄탄한 여성 주연과 조연으로 빛나는 '대행사'의 행렬은 뒤에서 옆으로, 그렇게 앞으로 계속될 여성들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여정에 동행하는 모든 여성들은 고아인처럼 생각할 것이다.
'내 한계를 왜 남들이 결정하지?'
대행사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왜 이 드라마의 배경이 대행사여야 했는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대행(代行), 문자 그대로 '남을 대신하여 행함'이라는 의미에서 탄생한 배경이 아니었을까. 일은 대신할 수 있어도, 남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 인생은 대행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기에 '대행사'란 배경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성취하려는 여자들, 주체적으로 길을 뚫는 여자들의 모습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토, 일 10시 30분만 되면 주말 출근하듯 다른 세상의 '대행사'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드라마는 종영되었으나 내 세상의 대행사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이끌든가 따르든가 비키든가'라고 적힌 고아인의 사무실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어디든 내 옆에는 동료들이 있음을 되새긴다. 내 한계를 남들이 결정할 수는 없으나, 남들이 있기에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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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