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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입은요?] 천사들의 식탁
쓰는 동안, 입은요? 6화 - 식탁
내 식탁은 모순투성이다. 노버터 수프에 열광하고서 빵 사이에 버터를 두툼하게 끼워 먹고, 질 좋은 올리브 오일이니 들기름이니 따지고는 라면과 떡볶이를 못 끊는다. (2022.12.15)
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매주 목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나는 이런 말에 약하다. 무항생제, 유기농, 노버터, 무설탕, 슈퍼푸드, 홈메이드... 물론 그런 방향성을 좋아할 뿐 철저히 지키며 사는 건 아니다. 내 식탁은 모순투성이다. 노버터 수프에 열광하고서 빵 사이에 버터를 두툼하게 끼워 먹고, 질 좋은 올리브 오일이니 들기름이니 따지고는 라면과 떡볶이를 못 끊는다. 소위 말하는 슈퍼 푸드로 아침을 시작하지만 저녁이 되면 정크 푸드에 홀리고, 야식을 경계하는 편이나 안주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러니까 밤 9시의 김치전에 흔들리지는 않지만 그 김치전에 술을 곁들이면 기꺼이 마중을 나갈 태세로 젓가락을 야무지게 쥐는 것이다.
'홈메이드'도 마찬가지다. 그 말을 좋아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 삶에 들여놓은 것은 홈메이드를 사 먹거나 얻어먹는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느냐고? 물론 직접 해 먹을 때도 있긴 하나, 그럴 때의 메뉴는 지극히 한정적일뿐더러 앞선 두 세계의 지분이 훨씬 커서 먼저 얘기해야 한다.
나와 L은 어디 가서 뭘 먹을까를 의논하고 실행하는 것, 또 방문하고 싶은 식당의 목록을 늘려나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활동 반경도 넓은 편이다. 우리 집은 경기도에 있지만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의 식당을 목적지로 찍고 훌쩍 이동하기도 하니까. 정성 어린 내공이 느껴지는 집을 발견했을 때의 포만감이란!
우리의 단골 식당 목록 속에 한때는 '직접 담은', '농사 지은'과 같은 수식이 많이 붙어 있던 한식 뷔페도 있었다. 몇 년 전 기준으로 이용 가격이 5,000원 정도였는데 10회권을 한꺼번에 사면 1회권을 덤으로 준다기에 우리는 10회권 묶음을 두 번이나 샀다. 주로 근처 직장인들이 홀로 혹은 단체로 오던 그곳에 모두 스물두 번을 간 후, 다음에는 근처 기업체에 붙어 있는 '집밥'집으로도 다녔다. 참 효율적인 시스템 아닌가 감탄하면서 말이다. 물론 끼니마다 한상차림을 누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간소화한다 해도 한식 밥상을 차리는 데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나와 L처럼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출퇴근하는 2인 가구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요리 근육이 생기기 전에는 분명히 동기 부여가 필요한데, 그걸 밥상 단위로 확대하기는 쉽지 않다. 시간에 몹시 쫓기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요리를 즐긴다면 시간을 내서 하겠지만 나는 딱히 그런 경우도 아니니.
우리 집에도 밥솥이 있다. 있긴 있는데 사용량이 너무 적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밥보다는 다른 것을 좋아했기 때문인데 나중에는 먼지 쌓이는 게 싫어서 아예 싱크대 깊숙이 넣어두었다. 필요할 때 꺼내서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4년 전이었다. 그 이후 밥솥은 줄곧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밥솥을 끌어내 뚜껑을 열면 그 안에서 몇 년 묵은 요정이 나올지도 모른다.
밥솥이 무대에서 사라진 뒤 당연히 쌀도 사라졌고, 간장이니 고추장이니 고춧가루니 하는 것도 사라졌다. 요리를 거의 하지 않으니 양념통들을 유통 기한이 다 찰 때까지 절반도 쓰지 못하고 버리는 일이 태반이었고, 결국 나는 모든 걸 사지 않기로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몇 년 전이었더라? 이런 우리 집에 들깻가루와 후추, 들기름이 있다는 게 내가 봐도 좀 어색한데, 고백하자면 들깻가루와 들기름을 너무 좋아한다. 그것은 완성 요리에도 얼마든지 뿌릴 수 있으니까. 완성 요리는 어디서 오냐고? 믿는 구석이 있다.
L이 주유소에서 사은품으로 작은 쌀 한 봉지, 어느 지자체에서 내가 받은 된장과 고추장 세트, 선물 받은 천연 조미료 세트나 멸치 세트, 지인이 수확했다고 보내준 배추와 무... 이렇게 요리가 필요한 것은 모두 차로 20분 거리에 사시는 부모님 댁으로 이동된다. 최근에는 쌀 20kg 기프티콘을 받기도 했는데, 아예 배송지로 부모님 댁 주소를 입력했다. 부모님 주소로 바로 가는 것 중에는 선배 K가 부쳐주는 김치도 있다. K는 매년 11월 본가에 가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김장을 하고는 그 귀한 김치를 내게 나눠준다. 벌써 몇 년째인지 너무 황송한 마음에 이러다 어느 날 내 집 앞에 김장 트럭 와 있는 거 아니냐, 강제 탑승되어 몇 년 치 김장 갚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너스레를 떨면 K는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한다. 처음에 K의 김치는 내 집 주소로 왔는데, 그다음 해부터는 "엄마 주소 이거 맞지?"하고 확인한다. 엄마가 김치를 잘라서 착착착 통에 담아주는 방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겼고, 결혼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어갔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식탁 위에 생선이 몸체로 다 누워 있으면 그걸 슬그머니 다른 접시 뒤로 밀어서 시선을 피하는 여섯 살 시절과 똑같다. 부모님 댁에 가서 먹을 때가 많지만 그조차 틈을 못 낸다고 찡얼거리는 딸을 위해 두 분은 직접 배달을 하시기도 한다. 아빠가 재료 손질하고 엄마가 요리하고 다시 아빠가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이 시스템은, 날로 더 정교해져서 가끔은 그 포장을 보며 어디서 팔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다.
여하튼 이 은혜로움 속에서 나는 효율이니 뭐니 하면서 밀키트에 적힌 '소고기 핏물을 제거하라.'만 보고도 낚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운전도 못해, 요리도 못해, 영어도 못해, 노래도 못해, 달리기도 못해... 아, 나 왜 이렇게 기능이 없지! 이런 말을 했더니 친구 A가 하는 말.
"옵션 다 뗀 거지 뭐.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인 거지."
그래서 나의 기본이 뭐냐고 묻자 친구가 '글쓰기'라고 둘러댔는데, 아니 나의 기본이 글쓰기였다니? 나는 사랑쟁이인 줄 알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사랑쟁이는 내 주변 사람들이다. 내가 이렇게 다채로운 삶의 식탁을 꾸려나갈 수 있는 건 모두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이니까.
사 먹는 얘기 했고, 얻어먹는 얘기 했고, 이제 직접 해 먹는 얘기도 하고 싶은데 공교롭게도 지면이 부족하네? 시간도 부족하고. 아니 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어차피 세상살이는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우선순위가 그래서 중요하다니까.
잠시 밀키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밀키트들이 너무 부지런해져서 나로서는 좀 피곤하다. 때로는 와 올리브 오일까지 있네, 후추도 들어 있네, 하면서 그 세심함에 놀라지만 보통은 지쳐버린다. 밀키트는 점점 정교한 맛을 구현해 내고 싶어 하고, 그러니 과정이 은근히 복잡해지고, 나는 단계가 많아지는 것을 따라갈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고, 그럴 바에야 직접 가서 사 먹겠다고 생각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밀키트의 세계를 가끔 열어보는 건 궁금해서다. 정말 그 맛이 날까? 한 번인가는 무슨 파스타 레시피를 따라가다가 잠시 고민에 빠졌는데, 아주 잠깐 면수를 안 남겨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따로 파스타를 만들어도 면수를 남겨두니까 그렇게 하면 되는 건데도 밀키트 레시피 어디에도 면수 얘기가 따로 없었으니 물을 홀랑 다 비워냈다. 그러다 요리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레시피에 코딱지처럼 붙어 있는 한 줄을 발견했다.
"볶을 때 팬에 면수를 부어도 좋습니다."
아니 이게 왜 아까는 안 보였지? 줄리언 반스의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요리책을 백 권 넘게 보유한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어느 날 레시피가 1, 2, 4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짧은 혼란에 빠진다. 사라진 3번 지침이 궁금한 그는 이게 출판사의 편집상 실수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기 위해 애쓰다가 급기야 그 요리책의 저자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 역시 진술을 번복하는 듯한 사용 설명서나 요리법을 보면 짜증이 난다. 면수를 다시 언급할 거면 내가 홀랑 버려버리기 전에, 바로 그 2번 항목에 넣었어야지! 이런 바보 같은 구성이라니!
줄리언 반스와 나의 요리 실력은 천지 차이지만, 닮은 게 있다면 음식 간을 보지 않는다는 것. 가끔 떡볶이나 파스타를 집에서 만들 때가 있지만 왜인지 음식 간을 보는 게 싫다. 먹는 건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식탁에 앉기 전까지는 조금도 간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는 요리란 부모님 댁에서 가져온 음식 데우기, 그리고 밀키트, 혹은 소설가 H의 표현에 따르면 '조립형 푸드' 정도다. 불을 쓰지 않는 조립식 요리. 그에 대한 얘기도 좀 해보고 싶지만 왜지? 지면이 부족하네.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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