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식물탐색] 나무의 안위와 풀잎의 안부
허태임의 식물탐색 3화
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무의 안위를 걱정하고 풀잎의 안부를 전하는 사람들, 우크라이나 국립식물표본관을 지키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경의와 사랑과 응원과 우정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2022.12.06)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지난 10월 어느 날 저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미사일로 공격했다는 소식이 속보로 나왔다. 올해 2월에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러시아가 도심에 가한 가장 맹렬한 폭격이 월요일 아침 키이우를 무자비하게 덮쳤다는 뉴스였다. 그곳의 삼성 사옥이 조금 파손되었고 다행히 우리 교민은 안전하다고 했다. 전쟁이 커지기 시작한 날이다. 나는 대체 휴일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푸틴아 작작 좀 해라, 속상한 마음에 혼잣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이 내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이었으니까. 전쟁은 강 건너 불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로 흘러드는 드니프로강. 실제로 그 강 너머 먼 나라의 일이기도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식물 표본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우크라이나 국립식물표본관이 키이우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갑자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그 이전에 채집된 식물 표본을 거의 다 잃었다. 식물 분류학의 오랜 전통은 중요한 표본의 경우, 두어 점 더 넉넉하게 채집해서 '증복 표본'이라는 걸 만들고 서로 다른 표본관에 보관한다. 소중한 자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똑같은 파일을 여분으로 복사해 두는 것처럼 일종의 백업 방식이다. 그래서 한국 전쟁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채집된 식물 표본을 보려면 그것을 지금까지 무사히 보관하고 있는 외국 표본관을 순례해야 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외국에 있는 우리 식물의 표본을 만나려면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온라인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각 표본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표본 중에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기준 표본(신종을 발표할 때 그걸 명명하는 분류학자가 근거로 제시하는 표본)'은 관련 정보를 검색하면 바로 검색이 가능하도록 해두었다.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표본의 구체적인 채집 정보를 표본관 담당자에게 제공하면, 고해상도로 스캔한 표본 사진을 메일로 받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어딘가에 오래 묵혀있던 표본이 기준 표본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때도 있다.
우크라이나 국립식물표본관은 평소에 내가 많은 정보를 얻는 곳 중 하나다. 2021년에 100주년 기념 행사를 갖기도 한 그곳에는 18세기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며 수집한 식물 표본이 잘 보존되어 있고 우크라이나의 식물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본이 70만여 점이나 보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백년 전통의 <우크라이나 식물분류학회지(Ukrainian Botanical Journal)>가 격월로 발간되어 표본관 홈페이지에 업로드되기 때문에 한 달 걸러 꼭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 그 학회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발간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10일의 미사일 폭격이 있기 전까지는 전쟁 상황이 그리 위급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10월 20일, 그 식물표본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더니 최근 근황이 올라와 있었다. 그날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표본관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건물이 좀 파괴되었지만 장 안에 보관된 표본은 멀쩡하며, 거기서 일하는 연구원들의 인명 피해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몇 차례 계속된 러시아의 공격으로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소식이 들렸다. 식물 표본에 대한 정보 제공이 어려울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고도 했다. 그때부터 내 안에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디언지에서 실시간으로 전하는 우크라이나 현지 전쟁 소식을 아침저녁으로 확인했다. 실상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10월 30일, 평소대로라면 우크라이나 식물표본관 홈페이지에 올해 다섯 번째 학회지가 올라오는 날이다.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한 채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와, 다행이다. 보통 때처럼 간결하게 정돈된 논문 몇 편이 실려있었다. 우크라이나 초원 서식지 보전의 필요성에 대한 논문을 먼저 눈여겨 읽었다. 그리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논문 한 편이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어 있었다. 제목은 이렇다.
'2022년 10월 10일 미사일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 표본관'
그건 우크라이나 식물표본관을 담당하는 두 식물분류학자의 기록이었다. 10월 10일, 그러니까 우크라이나 현지 시간 오전 8시에 우크라이나 전역에 러시아 미사일과 이란에서 지원한 자폭드론이 무차별적으로 떨어져서 특히 키이우 도심의 등굣길과 출근길 민간인 피해가 컸다고 논문의 저자는 적었다. 구체적으로 표본관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권위 있는 키이우국립대학과 이 대학의 오래된 부속 건물과 인근 박물관과 미술관이 큰 피해를 입었는다는 사실도 알렸다. 그 건물들은 군사적 목적의 시설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가 뉴욕타임즈에 지난 5월 19일에 기고한 '우리는 그것을 말해야 합니다. 러시아는 파시스트입니다.'의 한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에 암흑이, 우크라이나가 이기지 못한다면 수십 년의 어둠을 예상해야 한다고.
특히, 식물표본관의 피해를 알리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아려왔다. 그들은 '식물표본관의 과학적, 역사적, 문화적 풍부함과 가치는 짧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며 '이미 밝혀졌거나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숨겨진 과학적 지식의 실제 보관소'라는 점을 분명히 적었다. 논문에서 저자들은 그곳이 러시아의 침공으로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를 아주 상세히 보고하면서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각오를 밝혔다.
다가오는 겨울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가장 힘든 겨울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자비한 공격을 일삼는 과거의 전쟁을 답습해서는 우리 우크라이나를 결코 그들 편에 서게 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는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전력과 열과 물과 기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자원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비겁한 대량 학살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화적, 과학적 가치를 지니는 우크라이나의 국립 식물표본관을 지키는 것입니다.
논문이 나온 이후로도 러시아의 공습은 몇 차례 더 있었다. 예년과 같다면 이 달 말에 표본관 학자들은 2022년 여섯 번째 학회지를 펴낼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나무의 안위를 걱정하고 풀잎의 안부를 전하는 사람들, 우크라이나 국립식물표본관을 지키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경의와 사랑과 응원과 우정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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