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가 아들에게 남긴 말
"스승을 찾아 섬기라!"
『백범일지』는 평범했던 한 인간이 스승을 찾아 배우면서 큰 인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담은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스승을 찾아 섬기라'는 김구 선생의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백범 김구를 키운 스승은 누구일까요? (2022.11.22)
백범 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꼽히고,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김구 선생은 상해에서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어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그가 살아온 경력을 알리기 위해 『백범일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백범일지』의 첫 글에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습니다. 마치 유서처럼 써내려 간 이 편지에서 선생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_『백범일지』 중에서
두 아들에게 전한 마지막 당부의 말씀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김구 선생에게 '스승'의 의미는 각별했습니다. 김구 선생도 처음부터 완성된 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스승을 찾아 섬긴다는 삶의 원칙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범일지』는 평범했던 한 인간이 스승을 찾아 배우면서 큰 인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담은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스승을 찾아 섬기라'는 김구 선생의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백범 김구를 키운 스승은 누구일까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청소년기에 이미 여러 차례 실패와 좌절을 겪었습니다. 천대받는 상민 신분에서 벗어나려 과거 시험을 준비하지만, 과거 시험장에 온갖 비리가 넘치는 것을 보고 실망한 뒤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한 관상학 공부도 계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관상학 책에 따르면, 청년 김구의 관상은 성공할 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관상학 책에서 선생은 뜻밖의 한 문장을 발견합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긴 후부터 청년 김구는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가 아니라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수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감동적인 한 문장을 발견한 일은 김구 선생의 인생에서 작지만 큰 사건이었습니다. 평범했던 청년 김구가 큰 인물로 성장하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청년 김구가 찾아간 첫 스승은 선생을 동학 운동으로 이끈 '오응선'입니다.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동학에 호기심이 많았던 김구는 양반 출신 동학도가 근처에 산다는 말을 듣고 오응선을 찾아갑니다. 오응선 선생을 처음 만난 청년 김구는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김구가 공손히 절하자 그가 맞절을 했을 뿐 아니라, 상민이자 자기보다 어렸던 김구에게 존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당황한 김구에게 오응선 선생은 "나는 동학 도인이기 때문에 빈부와 귀천에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여러 차례 신분의 벽에 부딪히며 낙담했던 청년 김구는 동학의 이념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동학에 입도하기로 결심하고, 김창수(金昌洙)로 이름까지 바꾸었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첫 만남에서 오응선 선생은 청년 김구에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시의 통념을 뒤짚는 이 가르침은 청년 김구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고, 그러니 더 나은 조국을 만드는 데 몸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낙담한 채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청년 김구가 한국 현대사의 큰 인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18세의 청년 김구가 동학에 입도한 지 몇 달 만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수천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듬해에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나 황해도 지역의 동학을 이끄는 지도자(접주) 중 한 명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김구는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공격에 나서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게다가 피신해 있는 와중에 같은 동학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습니다. 큰 뜻을 펼치고자 했던 동학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또 다시 세상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을 때 만난 스승이 바로 유학자 '고능선' 선생입니다.
20세가 된 김구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의 집에 피신했을 때입니다. "나이 스물에 많은 과오를 저지르고 수많은 실패를 겪었으니 지금 와서는 참으로 민망할 뿐입니다"라고 백범이 털어놓자, 고능선 선생이 그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 되려는 본뜻을 가진 이상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
실패니 곤란이니 하는 것들을 겪은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본뜻만 변치 말고 쉼 없이 고치고 쉼 없이 전진하면
반드시 목적지에 다다를 날은 오게 마련이다.
_『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 중에서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한 청년 김구에게 가장 필요했던 조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능선 선생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김구의 뜻을 알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학문을 순서대로 가르치지 않고 '뚫어진 곳을 깁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입으로 전하여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백범을 가르쳤습니다.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다.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을 수 있어야 장부라 할 수 있다.
_『백범일지』 중에서
의거 당일 윤 의사는 김구 선생에게 시계를 서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김구 선생은 윤 의사의 시계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37년 후, 1932년 상해 흥구공원의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투척할 거사를 앞둔 윤봉길 의사에게 용기를 복돋기 위해 김구 선생이 들려준 말씀도 역시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제자의 큰 인물됨을 알아본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은 백범이 훌륭한 포부를 지니고, 그 뜻을 일관되게 지키고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섭렵했던 책들도 김구 선생을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시킨 커다란 원동력이었습니다. 특히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장교를 살해한 사건으로 해주옥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독서가 옥중 생활의 첫 번째라고 썼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고종 황제가 칙령을 내려 정지하지 않았더라면 교수형이 집행될 뻔한 날에도 선생은 아버지가 넣어준 『대학』을 읽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능선 선생이 전통만을 중시하는 반(反)개화 성향이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큰 스승으로 삼아 배웠던 것처럼, 김구 선생은 '세계 여러 나라의 모든 문화를 연구하여 우리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은 배워서 우리 것을 만들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많은 '신서적'들을 탐독했습니다. 『대학』 같은 유교 경전부터 19세기 당시의 서구 현대사를 다룬 『태서신사』(泰西新史, Robert Mackenzie, The 19th Century: A History)까지 선생이 읽은 책들은 매우 다채로웠습니다.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이 평범한 청년에서 우리 역사의 큰 인물로 성장해가는 성장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청년 김구가 찾아 스승으로 삼았던 선생님들은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눈을 틔어 주었고,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본뜻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의 성장 과정에서 특별한 점을 찾는다면, 운 좋게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배움을 찾아나서며 끊임없이 스스로 성장하고자 했던 점입니다.
김구 선생의 호가 의미하듯이 『백범일지』는 백정과 범부의 마음으로 쓴 책입니다. 『백범일지』에서 강조했던 "누구나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선생의 말씀은 백정이나 범부를 비롯해 누구나 스스로 섬길 스승을 찾아 섬긴다면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배움을 찾는 젊은이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며 묻는다면, 아마도 김구 선생은 '스스로 스승을 찾아 섬기라'는, 아들들에게 남긴 당부의 말씀으로 답하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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