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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의 글 쓰는 식탁]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월간 채널예스> 202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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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꼭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 같다. 내 지난 시간이 참 비생산적이었다 싶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용했던 것은 아니다. 돌아온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얻었으니까. 그 귀퉁이가 얼마나 내게 알맞은 자리인지 그걸 알게 되었으니까. (2022.09.05)

언스플래쉬

전북 전주의 작은 책방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뵌 이후로 꼬박 이십 년 만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언덕배기에 있었고, 우리는 강의실까지 가는 그 길을 골고다 언덕이라고 불렀다. 전날에 마신 술의 숙취가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지각하지 않기 위해 그곳을 달리면 예수가 십자가를 지던 마음이 절로 이해가 됐으니까.

"야, 나 토할 것 같아."

강의실 귀퉁이에 앉자마자 엎어진 나를 보며 친구는 히죽히죽 웃었고, 걔가 웃으면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창밖은 언제나 봄이었고(봄 학기에 들었던 수업인지, 그 시절의 모든 기억이 봄인지 가물가물하다), 강의실 안에는 시를 읽어 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의 음성을 옷처럼 입고 나타난 시어들은 해석이나 해독을 요구하는 일이 드물었다. 악보나 연주 기법을 몰라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처럼 선생님이 읽어 주시는 시에는 몰라도 알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쉽고 순해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고개가 떨궈지는, 그러다 책상에 머리를 쿵 박게 되는 그런 것도.

선생님을 다시 만나러 간 곳은 숙취를 십자가처럼 지고 걷는 골고다 언덕이 아니라, 한때 성매매 업소가 집결되어 있었던 선미촌이었다. 선미촌의 진짜 이름은 물왕멀길. 그곳에는 물이 좋은 동네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물결서사'라는 서점이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아픈 기억을 가진 장소에 진짜 이름을 되찾아 주고자 애쓰는 곳, 홍등가의 사나운 불을 끄고, 문학의 고요하고 밝은 불을 밝히는 곳이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선미촌의 마지막 성매매 업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물결서사의 문을 열자 더위에 조금 지친 어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는 게 어쩐지 부끄러워 귀퉁이에 앉았다. 어쩌면 선생님은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실까, 나는 또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나만 아는 이십 년 전의 풍경을 몰래 꺼냈다 넣었다, 내가 얼마나 분주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낭독회가 시작되고 선생님과 독자들이 시를 안부처럼 주고받으며 읽는 동안, 나는 내가 넘어온 작은 골고다 언덕들을 떠올렸다. 토할 것 같았고, 숨이 찼고, 우습고 괴로웠던 나의 언덕들. 그렇게 경사지를 애써 넘어와 앉은 자리가 이십 년 전 딱 그곳이라니... 사람은 꼭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 같다. 내 지난 시간이 참 비생산적이었다 싶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용했던 것은 아니다. 돌아온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얻었으니까. 그 귀퉁이가 얼마나 내게 알맞은 자리인지 그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지금부터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무엇을 하며 귀퉁이를 지키면 좋을까?

낭독회가 끝나고 선생님과 서점지기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시원한 술에, 자꾸 보니 얼굴이 생각날 듯도 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나는 시나 글보다도 이렇게 달달한 밤이 더 좋으니 아무래도 뛰어난 글쟁이는 틀린 모양이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겠다. 그러니까 좋은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삶. 그런 삶이 여기 귀퉁이에 있다.

막걸리 잔을 부딪치면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는 젊은 책방지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지금 어떤 언덕을 넘고 있을까? 팔이 긴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자리에서 손을 뻗어 자꾸만 뒤로 넘어가는 그의 몸을 받쳐주고 싶은데...

막걸릿집을 나와 선생님을 배웅하고 서점지기와 함께 밤거리를 걸었다. 선생님의 시 한 편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구 알든 모르든 이십 년 삼십 년을 거기 있다는 것

우주의 귀한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우리 다들 우주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느라 애쓰는 것이 반갑고, 고맙고 애달프기도 하여 함께 걷던 이의 등을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에이, 아무래도 팔이 짧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귀퉁이끼리 알아보는 일, 알아주는 일, 손을 번쩍 들고 인사하는 일, 그게 전부이지 않을까. 술 동무와 갈림길에서 헤어지며 "조심히 들어가요!", "힘내요!" 외치고 걸었다. 그 밤, 귀퉁이를 지키던 모든 이들이 가만히 웃어주는 것 같았다.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선운사 풍천장어집」, 창비, 2015



어린 당나귀 곁에서
어린 당나귀 곁에서
김사인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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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유진(작가, 번역가)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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