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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다정한 발걸음 -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그림책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
모든 심부름에는 완수해야 하는 목적이 있지만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죠. 서로 어떻게 도와가면서 이 예상 밖의 변수들을 헤쳐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2022.08.24)
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어린이에게 심부름은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고 해도 큰 모험입니다. 일본의 그림책 작가 하야시 아키코의 첫 번째 그림책은 1973년에 출간된 『이슬이의 첫심부름』이었는데요. 그는 자신에게도 첫 모험이었을 이 책에서 동생을 위해 우유를 사러 가는 한 어린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상승하는 어린이의 심장 박동을 그려냅니다. 아슬아슬한 변곡점을 여러 차례 거쳐서야 이슬이의 첫 심부름은 성공합니다. 그 대단한 임무가 끝날 때면 독자들도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유타 바우어의 그림책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은 이 정도의 규모가 아닙니다. 한층 규모가 큰 심부름입니다. 날쌔기로 소문난 예페는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에 가서 임금님의 편지를 전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언덕을 몇 개 넘고 구불구불한 강을 거슬러 올라 숲길을 통과해야 하는, 난이도가 높은 심부름입니다. 저는 책을 펼치자마자 이 대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린이라고 해서 작은 심부름만 하라는 법이 있나요? 임금님의 특사, 외교 문서 송달, 생각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페의 길도 순탄치 않습니다. 다친 아빠 다람쥐를 도와주고 울고 있는 꼬마를 달래고 시장에 가야 하는 엄마 돼지 대신 아기 돼지들을 돌봅니다. 일단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나 했더니 엄마 돼지는 사정이 생겨 일주일이나 지나서 되돌아옵니다. 심부름도 거창하더니 시간의 스케일 또한 다르네요.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시 길을 떠나는 결연한 예페의 표정을 보면 곧장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갈 것 같지만 멈추어야만 하는 일이 계속 생겨납니다. 염소 할아버지를 만날 때쯤은 예페의 뒷모습이 한결 듬직하게 보여요. 심부름은 진행 중이며 예페는 성장 중인 것입니다.
유타 바우어는 그림책 안에 각별한 장치 하나를 마련해 둡니다. 예페가 이웃나라까지 가는 동안 예페에게 심부름을 시킨 임금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림책 하단에 인화하지 않은 필름처럼 글 없는 흑백의 띠 그림으로 그려둔 것인데요. 유타 바우어는 전작인 『기억나니?』에서도 흑백의 드로잉을 책의 좌측 하단에 그려 넣어 면 분할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바 있습니다. 이원 중계방송 같은 이 방식은 독자에게 제 3의 관찰자라는 능동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기타미 요코의 그림책 『루와 린덴 언제나 함께』에서도 이 책과 비슷한 띠 그림의 면 분할 구성이 등장하지만 유타 바우어는 이 타임라인의 배치에 환상성을 보탭니다. 예페가 다녀온 길은 물리적 시간의 속도를 적용하고 임금님의 생활에는 심리적 시간의 속도를 적용한 것인데요. 이 두 개의 시계 덕분에 예페가 걸었던 길의 스케일을 더욱 웅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페의 심부름은 오디세이아가 됩니다.
임금님은 기나긴 예페의 출장길 사이에 사랑하는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그 강아지를 떠나보내고 고양이를 식구로 맞아들입니다. 인연을 만나 청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웁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겠어요. 우리가 살다가 겪는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겠지요. 독자는 에페가 심부름 가는 길에 돌보는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는 것과 동시에 임금님의 다사다난한 삶을 나란히 들여다봅니다. 평행의 필름이 끝나는 순간은 예페가 다시 임금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책 안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페의 심부름 가는 길』에서 말하자면 3부에 해당하는 후반의 전개, 임금님과 예페가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심부름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걸 잔잔하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모든 심부름에는 완수해야 하는 목적이 있지만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죠. 서로 어떻게 도와가면서 이 예상 밖의 변수들을 헤쳐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이 책을 읽고 어린이 독자들이 예페의 성장에서 나란히 뿌듯함을 느낀다면 어른 독자들은 임금님의 변화에서 비선형적인 세계를 살아갈 지혜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예페의 심부름은 성공적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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