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디자이너 김경민 “절대다수는 실무를 하고 있잖아요”
에세이 『날마다, 북디자인』
내 디자인이 돋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작가의 메시지를 세상에 잘 전달하는 일이에요. 제가 디자인하는 건 ‘책’이니까요. (2022.08.05)
“나도, 내 주변의 많은 이들도 스타 디자이너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 10년을 한 자리에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책을 만들고 있다.” _(72쪽)
10여 년 차 북디자이너 김경민 저자는 아이가 아파서 잠을 설치던 새벽, 이 책의 목차를 완성하고 샘플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투고했다. 엄마가 되고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이 북디자이너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본업이 아니라 자신 없었지만, 그걸 상쇄하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꿈꾸던 스타 디자이너는 되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 이야기의 가치를 알아봐 준 출판사 덕분에 원고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날마다, 북디자인』은 매일 책을 디자인하는 저자가 평범한 절대다수를 위해 꾸밈없이 쓴 직업에 대한 소회다.
다른 디자이너가 작업한 본인의 책을 보니 어떤가요?
너무 좋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책이 훨씬 더 예쁘게 나와서 놀랐어요. 사실 출판사 대표님께서 “직접 디자인할 생각 없냐”고 물으셨는데, 단호하게 싫다고 말씀드렸거든요.(웃음) 다른 디자이너들은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작업할지 궁금해서요. 아마 디자이너분께서 고생 많이 하셨을 거예요. 제가 다양한 요구를 했거든요.
어떤 요구요?
요즘 나오는 책들은 웹이나 모바일에서 보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약물(활자 중 문자, 숫자 외에 각종 기호, 구두점, 괄호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 크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본문이 부드럽게 읽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조정을 많이 했어요. 구두점의 위치를 조금 옮기거나, 폰트의 너비를 줄여달라는 등의 디테일한 수정이었죠. 사실 디자이너 입장에서 무척 귀찮은 작업일 수 있는데, 흔쾌히 의견을 수용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투고 원고였죠. 아이가 아팠던 새벽, 이 책의 차례를 만들었다고요.
출산하고 굉장히 큰 감정적 변화를 겪었어요. 아이를 낳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이전의 나를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세 살 무렵까지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던 아이가 코피를 쏟으면서 저를 깨웠어요. 코피를 닦아주고, 아이는 다시 잠들었지만 저는 상태를 지켜보느라 밤을 새웠는데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스쳐지나가더라고요. 이 생각을 그냥 흘려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떠오르는 말들을 썼어요. 그게 책의 목차가 되었고, 거의 바뀌지 않은 채 출간됐어요.
‘북디자이너’에서 ‘저자’가 되고 나니, 달리 보이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디자인을 할 때는 마감을 하고 나면 속이 시원했어요. ‘와 진짜 끝이다!’라는 후련함이 있었죠. 그런데 원고는 마감했을 때부터 책 작업이 다시 시작되더라고요.(웃음) 또, 디자인을 할 땐 사실 서포터의 역할이 강했어요. 편집자님이 책의 감독이라면, 저는 한 명의 스태프였으니까요. 그런데 저자가 되고 나니 편집자님과 함께 주체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게 어렵지만, 즐겁기도 했어요.
업무를 시작하기 전, 매일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신간을 둘러보신다고요. 최근 북디자인에서 느껴지는 트렌드가 있나요?
사실 북디자인은 트렌드를 말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디자인 트렌드를 쫓아가면 글의 요지를 벗어나게 되거든요. 책은 본문의 내용과 느낌을 충실히 반영해서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디자인이 인기를 끌었다고 해서 그걸 다른 책에도 적용할 수가 없어요. 독특한 분야죠. 다만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표지 글씨가 점점 작아진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경제경영서 표지는 무조건 큰 글씨로 작업해야 잘 팔린다”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경제경영서도 폰트를 크게 쓰지 않는 추세더라고요.
디자인 상품으로서 책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책만큼 구매자와의 교류가 깊은 상품은 없는 것 같아요. 보통 물건은 일방적인데, 책은 그렇지 않아요. 분명 완성된 상품이지만 내가 주도해서 즐길 수 있어요.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속도를 조절해가며 읽을 수도 있죠. 컴퓨터 화면에서 완성된 디자인이 인쇄해서 손에 잡히는 물성이 된다는 것도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디자인이라도 어떤 종이를 쓰고, 인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책은 내 몸의 감각을 깨우는 상품인 것 같아요.
책을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테일이 있나요?
최대한 작가가 쓴 글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는 책인데 날 선 디자인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작가의 문체와 내용을 유심히 보고, 그 느낌에 맞는 디자인을 하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속독을 하면서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치고요. 그 문장을 모아서 프린트한 뒤 계속 보면서 디자인을 해요. 그렇게 작업하면 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오더라고요.
북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잘 모르는 사람은 책의 디자인을 모두 북디자이너가 기획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크지 않죠.
그게 평생 저를 괴롭히는 요소 중 하나였어요. 저자와 편집부의 의견에 맞춰 디자인을 해야 하니까요. 지금은 많이 내려놓았어요. 나와 의견이 다를 뿐이고, 수정을 거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때가 많거든요. 이따금 내 눈에 아쉬운 디자인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책으로 다가갈 거라고 믿으면서 작업을 해요. 사실 책은 저만의 작품이 아니잖아요. 공동 작업이고, 저자의 글이 책의 8할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저자가 원하는 바를 반영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편집자와 북디자이너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북디자이너 입장에서 일하기 좋은 파트너는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가 만드는 책에 대해 정확히 아는 편집자와 일할 때가 가장 좋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눌 의향이 있는 분들과 일할 때는 과정이 고되고, 수정이 많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업을 하면서 배우는 게 많거든요.
어떻게 북디자이너가 되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매일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그림을 그렸거든요. 북디자인은 정말 우연히 배우게 됐어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진로를 선택하면서 제 점수에 맞는 여러 디자인과를 알아봤고, 그중에 출판디자인과가 있었죠. 출판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역시나 잘 못했어요.(웃음) 학부 시절 내내 점수가 안 좋아서 나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졸업 작품을 만들고 유일하게 A+을 받았어요. 북디자인은 내용에 충실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디자인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직접 콘텐츠를 만들었거든요. 사진 찍고, 그림도 그리고요. 교수님들이 그걸 높게 사주셨던 것 같아요. 그 일을 계기로 자신감이 생겨서 졸업 후 출판사에 취직을 했어요.
“책을 내기로 결심하고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음에도, 이게 정말 맞는 일인가 고민할 때가 있었다”고요. 어떤 마음이었나요?
잡지에서 종종 북디자인의 인터뷰를 볼 때가 있는데요. 그분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책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하고 나름의 철학을 이야기하시잖아요. 그런데 저의 글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한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하는 평범한 사람이 북디자인이라는 일에 대해 말하는 책이기 때문에 다른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볼지 걱정스러웠어요. 제가 하는 말이 모두 정답은 아닐 수도 있고요.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죠. 절대다수는 실무를 하고 있고, 이게 북디자인의 현실이잖아요. 북디자인 지망생들이 소수의 스타 디자이너만 바라보고 이 세계에 뛰어들면 분명히 큰 괴리감을 느낄 거예요.
작가님도 그런 시절을 겪으셨어요?
그럼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바꿨어요.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내 앞에 할 일이 있다고요. 또, 연차가 쌓이면서 정말 중요한 걸 깨달았죠. 내 디자인이 돋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작가의 메시지를 세상에 잘 전달하는 일이에요. 제가 디자인하는 건 ‘책’이니까요.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교수님들이 항상 말씀하셨어요. “네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술을 하지 말라”고요. 디자인은 발주자가 있고,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물론 디자이너로서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고집을 부릴 수 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구별하는 게 중요하죠.
좋은 북디자인이란 무엇일까요?
글과 디자인이 잘 어우러져야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본 책 중에는 ‘대니 샤피로’의『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가 그랬어요. 밑줄을 긋지 않은 페이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글이 정말 좋았는데요. 그 느낌을 디자인에서도 구현해냈더라고요. 표지도 멋있지만, 본문도 정말 잘 읽히죠. 보통 글쓰기에 관한 책은 문단을 길게 배치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짧게 짧게 문단을 끝냈어요. 글과 디자인이 한몸이 된 것 같은 책이었죠.
개인적으로 디자이너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북디자인은 선호하지 않아요. 북디자인은 글에 기본해서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표지만 보고도 누가 디자인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책을 보면 가끔 이게 책을 위한 디자인인지, 개인의 작업을 위한 디자인인지 헷갈리곤 해요.
북디자이너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실수하는 건 당연하니까 기죽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책에 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담을 많이 쓴 이유죠. 어차피 일을 잘하게 되기까지는 누구나 시간이 걸려요. 그 과정에서 자신을 갉아먹지 않았으면 해요. 실수로 망친 책은 다시 만들면 되지만, 내가 망가지는 건 돌이키기 어렵거든요.
부록으로 실린 ‘마감 전 체크리스트’가 생각나네요.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독자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제가 매일 체크하는 리스트를 정리해서 넣었어요.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일일이 체크하지 않으면 꼭 사고가 나더라고요. 익숙해진 일일수록 긴장하며 자기를 돌아보는 습관을 갖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북디자이너로서 최근의 고민이나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 있나요?
예전에는 ‘이거 하나만 하고 관둔다, 마흔 살까지만 일한다’ 같은 생각을 했거든요(웃음). 요즘은 열심히 일하되, 감은 떨어지지 말자는 생각을 해요. 고인물이 됐지만, 썩은 물은 되지 말자고요.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함께 그 일에 대해 고민해줄 수 있는 선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비울수록 작업이 더 잘 되고, 일이 즐거워지는 것 같아요.
*김경민 인생의 절반을 뚝 떼어 생각해보니 그 절반의 대부분을 북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살거나 북디자이너로 살았다. 스타 디자이너가 될 줄 알았는데 10년째 한 회사, 한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자리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오래 일할 수 있을지 고민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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