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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학자 임소연 “여성이 과학을 만나면”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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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성차별적인 역사를 지닌 과학 기술에 뛰어들 때, 내가 비판하던 거대한 제도에 스스로 굴복하는 건 아닐까 늘 불안과 긴장을 느껴요. 그런데 지금은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생각해요. (2022.08.03)


과학 기술은 여성의 적일까? 여성이라면 누구나 과학 기술이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여성들은 과학을 못한다는 편견. 남녀의 전통적인 역할을 정당화하는 듯한 생물학적 지식. 그러나 여성으로서 과학 기술을 연구해온 임소연 저자는 “여성의 친구가 될 만한 과학도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고고한 과학이 아닌, 여성의 일상을 돕는 지식은 가능할까?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살아있는 과학 기술을 연구한다

‘여성’과 ‘과학’의 새로운 관계를 제안하는 책이에요.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요?

제가 처음부터 젠더 문제에 집중한 건 아니었어요. 원래 연구 분야는 과학 기술과 몸이었는데, 성형 수술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2016년부터 페미니즘 담론이 다시 떠오르면서 젠더와 과학 기술에 대한 강연이나 인터뷰 요청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사회가 원하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실감하고 있었는데, 마침 편집자님이 여성과 과학 기술에 대한 책을 써보자고 제안하셨죠.

‘과학 기술학’은 과학 기술을 인문, 사회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융합 학문이라고요. 그중에서도 ‘성형 수술’을 연구 분야로 삼으셨어요.

“살아있는 과학 기술을 연구합니다.”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과학 기술' 하면 사회와 분리된 객관적이고 순수한 모습을 떠올리잖아요. 반대로 ‘살아있는 과학 기술’은 구체적인 일상에서 다양하게 실천되는 지식을 말해요. 예를 들어 성형 수술은 대단한 일을 하는 과학 기술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사회 현상으로서 비판받아왔잖아요. 말하자면 ‘오염된 과학 기술’인데, 이분법을 넘어 이것 역시도 과학 기술의 한 모습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서두에서 과학 기술계의 성차별적인 문화를 지적하셨어요. 자연 과학을 전공한 작가님도 차별을 피부로 느끼셨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 아이였어요. 그러니까 저를 이상한 여자아이로 보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예요. 한동안 그게 콤플렉스가 될 정도로요. 막상 과학 고등학교에 가니 남자애들만큼 잘하지 않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겠더라고요. 그렇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한동안 접었어요. 그러다 대학교에서 여성 생물학자 '루스 허버드'가 생물학의 남성 중심성을 비판하는 글을 읽었어요.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과학을 새롭게 볼 수 있겠구나 해방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페미니즘을 계기로 과학과 다시 친해질 수 있었어요.

과학 기술이 여성의 적이었던 이유는 과학 지식이 성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인식 때문인 것 같아요. 특히 생물학적 결정론이 성차별적 구조를 뒷받침한다는 비판이 많았는데요. 

전통적인 생물학적 지식이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한 건 사실이에요. 이를 비판해온 페미니즘은 지금까지 제 역할을 해온 것 같고요. 문제는 그러다 보니 과학 기술 전체가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죠. 그렇지만 과학 내부에서도 꾸준히 비판이 이루어져 왔고, 지금은 생물학자들조차 생물학적 지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에 반대하거든요. 이미 페미니즘 지향을 가진 여성 과학자들이 새로운 과학 지식을 만들어왔고요. 충분히 과학과 여성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여성의 경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과학 기술에 여성들의 경험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우울증과 임신의 경우, 여성의 관점을 참조한 연구가 부족했다고요. 

우울증과 임신 연구는 대표적으로 여성의 경험이 배제된 사례예요. 최근에야 우울증이 뇌뿐만 아니라 장과 연결된다는 결과가 주목받고 있고, 간과되어온 태반의 역할이 조명되기 시작했죠. 그 배경에는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현상이 있어요. 여성들의 자전적인 경험이 쏟아졌고, 여성 우울증에 대해 연구한 '하미나' 작가나, 임신 경험을 관찰한 '우아영' 과학 기자처럼 과학 리터러시를 가진 여성들이 나섰죠.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여성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드러났어요. 입덧의 경우, 극심한 고통을 겪는 임산부들이 많았음에도 치료약이 없다고 하거나 엄마의 역할로 포장되어 왔거든요.

임신과 육아에서 남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대목은 통쾌하기도 했어요. 그간 난임이나 태아의 건강은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졌으니까요.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영역으로만 취급되다 보니, 그에 따른 책임도 여성 개개인이 지는 구조였죠. 그런데 실증 연구를 보면 아버지의 역할도 중요하거든요. 단순히 유전자뿐만 아니라 여성이 처한 사회 문화적인 환경을 봐야 한다는 논의도 많아졌고요. 난임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난임을 해결하는 기술로 냉동 난자를 논의하지만, 남성을 위한 정자 냉동 시나리오는 없어요. 여성만큼이나 남성의 정자 역시 노화의 영향을 받는데 그 사실은 삭제되는 거죠.

인공 지능 분야에서도 성차별 문제가 제기돼요. 최근 여성형 챗봇 서비스 ‘이루다’가 혐오 표현을 학습하면서 논란을 일으켰죠. 차별하지 않는 인공 지능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선 ‘왜 인공 지능을 인간처럼 만들어야 하는가?’ 의문이 들어요. 인간을 닮은 기계를 만들려는 목표도 사실상 남성의 욕망 아닐까요? 기업의 음성 인식 스피커나, 가상 비서, 대화형 챗봇들이 젊고 친근한 여성을 모델로 하는 반면, 뛰어난 신체 능력을 수행하는 로봇은 다 남성형이거든요. ‘인간’을 닮아야 한다는 말 뒤에 젠더화된 욕망이 있는 거죠. 여기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특정 역할의 기계가 필요하면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면 되는 건데, 왜 굳이 인간의 모습을 닮아야 할까?

인공 지능의 편향을 제거할 수 없다면, 차라리 사회적 차별을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인공 지능의 혐오 발언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실의 차별을 잘 학습한 결과물이에요. 사회의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인간을 닮은 인공 지능은 편향을 피할 수 없죠. 그렇다면 이 사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어떨까요? ‘구조적인 차별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는 거예요. 과학 기술이 페미니즘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 같아요. 데이터를 통해 구조적인 성차별을 입증하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거죠.

여성의 목소리가 더 필요하지만, 여전히 이공계에 진학하는 여학생의 비율은 낮아요. 이공계는 능력에 따라 대우하므로 실질적 차별은 없다는 반론도 제기됩니다.

이공계의 ‘능력주의’는 신화예요. 오히려 능력주의에 역행한다는 사실이 입증됐죠. 미국의 한 연구에서 고등학교 수학 및 과학 학업 성취도와 대학 진학 시 전공 선택 간 상관관계를 살폈어요. 그런데 남학생은 특별히 성취도가 뛰어나지 않아도 이공계에 진학을 하는 반면, 여학생들은 뚜렷하게 성취도가 높은 사람만 해당 전공을 선택하는 거예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특별히 뛰어나서 과학 기술 분야에 많이 진출하는 게 아닌 거죠. 이 성비 불균형 현상을 해결하려면, 능력을 갖춘 소수의 여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편견을 넘어야 해요. 평범한 남학생만큼이나 평범한 여학생도 과학 기술계에 진출할 수 있어야 하죠.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자

코로나19를 계기로, 인류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하는 ‘인류세’ 논의가 활발한데요. 정작 지구와 환경을 논의하는 곳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고요. 

‘인류세 담론은 백인 남성이 쓴 반성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1세계 백인 남성들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 한계에 도달하니까, 과학 기술과 시장 경제로 해결하려고 하고 여성들은 늘 대안으로만 소환된다는 거죠. 그러나 ‘인류세’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비인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위기거든요. 이분법을 넘어온 페미니즘의 사유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예요.

그 대안으로 ‘에코 페미니즘’의 부활을 이야기했어요.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에코 페미니즘’은 이미 유행이 지난 논의처럼 보였는데요. 

과거의 것을 무조건 폐기하기보다, 주어진 유산을 잘 활용하며 나아가는 태도가 필요해요.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한 사유인데요. 최초로 인간 아닌 존재를 페미니즘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어요. 

과거의 에코 페미니즘이 자연과 여성을 동일시하여 비판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에요. 특히, '도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선언한 이후, 에코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신’은 낡은 것으로 간주됐죠. 그런데 도나 해러웨이조차 에코 페미니즘의 사유를 배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근에는 에코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거든요. 인류가 위기에 도달한 지금이야말로 다시 여성과 자연의 연결을 추구했던 에코 페미니즘의 사유가 부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과학 기술을 추구할 때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도 고백하셨어요. 

한마디로 ‘오염에 대한 불안’ 같아요. 여성이 성차별적인 역사를 지닌 과학 기술에 뛰어들 때, 내가 비판하던 거대한 제도에 스스로 굴복하는 건 아닐까 늘 불안과 긴장을 느껴요. 그런데 지금은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생각해요.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완전무결한 상태는 없거든요. 과학 지식을 흡수하면서, 매 순간 내부의 문제에 저항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오염을 감수하면서 모순을 견디자고 말하고 싶어요. 그럴수록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동료와 연결되어 있는 게 중요해요. 한번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보다 서로 믿어주는 관계가 중요하죠. 한번 타협하더라도 다음에는 변화를 모색하면서, 여성들이 힘을 합쳐 과학을 바꿔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2019년, 하미나 작가를 포함하여 ‘여성 과학 기술 연구 그룹’을 만드셨어요. 결성 배경이 궁금한데요.

‘왜 여성만 매 순간 능력을 입증해야 할까’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어요. 대다수 남성들은 과학자로 잘 살아가는데, 여성들만 소모적으로 매 순간 능력을 입증하다가 빨리 지치는 거예요. 그 차이는 멤버십이에요. 과학계에 속하기만 하면 남성들은 서로의 능력을 보증하는데, 여성들에게는 자리가 없는 거죠. 그럼 최소한 우리끼리라도 서로의 능력을 보증해주자. 그렇게 다섯 명의 동료 연구자들이 모였어요. 가입 조건이 있냐고요? 여성과 과학 기술을 고민하는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웃음)



*임소연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과학 기술학 전공으로 과학 기술과 젠더, 몸과 인간 향상기술, 신유물론 페미니즘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임소연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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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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