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일으킨 모녀의 산티아고 순례기
『조금 일찍 나선 길』, 『너에게 보여주고픈 길』 태윤, 김항심 저자 인터뷰
자기답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한 걸음만 걸어보라고, 가볍게 등을 밀어주는 이야기. 『조금 일찍 나선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딸 버전, 『너에게 보여주고픈 길』은 엄마 버전이다. (2022.07.13)
엄마와 딸이 함께 걸었다. 그것도 800킬로미터나 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열여섯 학교 밖 청소년이었던 딸과 마흔여섯 부모 교육·성평등 강사인 엄마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걸은 순례길 여행기를 각자 『조금 일찍 나선 길』, 『너에게 보여주고픈 길』로 펴냈다. 성격도, 취향도, 스타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유쾌 발랄한 두 명의 저자, 태윤과 김항심을 만나보자.
각자 책 소개를 부탁드려요.
태윤 : 『조금 일찍 나선 길』은 엄마와 함께 순례길을 걸은 이야기를 딸의 시선에서 쓴 책이에요.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었던 30일여의 시간을 담았고요. 먹고, 걷고, 힘들어하고, 웃어가며 충실히 여행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웃으며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항심 : 『너에게 보여주고픈 길』을 독자가 되어 읽어보니 문장이 단단해요. 잘 썼다는 말이 아니라 순례길에서 날마다 몸으로 겪어낸 것들만 쓴 문장들이구나, 새삼 느껴졌어요. 제 순례기는 800킬로미터를 걸으며, 나와 아이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된 이야기, 자기다운 힘을 찾아가는 날들의 기록입니다.
그때, 왜, 하필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나요?
김항심 : 저는 '걷기'로 삶을 바꿔 본 강렬한 경험이 있어요. 산티아고는 비교적 안전한 길이었죠. 스스로 학교를 나온 태윤이에게 힘을 찾게 해주고 싶은 딱 좋은 때를 만났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태윤 :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윤아, 너 어차피 여름에 공부 안 할 거지?’ 하더니 ‘그럼 산티아고에 가자!’라고요. 저는 열네 살 여름에 학교를 그만두고, 열다섯 살에 중등 고등 검정고시를 마쳤어요. 그리고 열여섯이 되던 해, 마음 놓고 떠날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자는 건 엄마와의 약속이었고, 적당한 시기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된 거죠.
책 속에서 특별해 보이는 순간이 많습니다. 순례길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건가요? 두 분에게 특별했던 걸까요?
태윤 : 제 책 어디엔가 이렇게 적었더라고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길 자체가 아니라 걷는 우리에게 있다. 까미노는 오롯이 걷는 사람의 것이자, 길을 온전히 누리고, 즐기고, 무언가를 배워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무언가를 배워가도, 배워가지 않더라도 충분하다” 라고 고치고 싶어요. 순례길은 분명 그 자체로 특별하지만, 세상에 특별해질 수 있는 순간과 공간은 순례길 외에도 정말 많다고 생각해요. 그걸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나’를 만남으로써 의미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김항심 : 순례길이 특별한 이유는 순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걸어서일 거예요. 순례길 800km를 걸으면서 새롭게 만나는 마음들이 순례자들의 수만큼 반짝거립니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길이 될 수밖에 없어요.
여전히 떠오르는 경험 혹은 인상적인 장소가 있을까요?
김항심 : 볕이 따갑고 유난히 지루했던 오르막을 힘겹게 오를 때, 경쾌하게 달려 내려오던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 모습이 너무 섹시한 거예요. 탈까봐 입고 있던 긴 옷을 당장 벗었죠. 나도 저렇게 섹시하게 달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고요. 요즘도 매일 새벽 5시만 되면 무조건 나가서 달립니다. 섹시한 스페인 할머니를 떠올리며 함께 달리고 있어요.
태윤 :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까지 가던 길이요. 그날 17킬로미터쯤을 정말 폭풍 속에서 걸었어요. 바람이 휘몰아쳐 발을 제대로 내딛지 못할 정도로 힘든 길이었는데, 엄청나게 웃으며 걸었던 기억이 나요. 노래도 흥얼거렸는데 노랫소리가 저한테도 안 들리는 거 있죠. 그런 기억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요. 바람 속에서 날아다니듯 걸었던 그날 이후, 순례길을 걷는 마음도 조금 달라졌던 것 같아요.
도서출판 어떤책 김정옥 대표님의 추천사가 눈에 띕니다. “좋은 책은 한 가지로만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로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인지요?
태윤 : 제가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읽히고픈 독자는 엄마 한 사람이었어요. 엄마가 산티아고 여행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는데, 걸었던 길들을 '장면'으로만 기억하고 구체적인 '정보'는 다 잊고 있더라고요.(웃음) 숙박 시설 이름, 지명, 우리가 먹었던 음식, 이런 정보들만 투박하게 적어서 보내려다가,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순례길 첫날 이야기만 한 다섯 페이지 분량을 썼어요. 엄마가 그걸 읽고는 새벽 1시에 전화를 건 거예요. 웃긴다고, 재밌다고. 이 책이 독자 여러분께도 그렇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또, 열여섯 살 학교 밖 청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도요.
김항심 : '너'의 자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많아요. 자기 삶을 바꾸고 싶은 사람, 자기 마음을 돌보고 싶은 사람, 자기답게 살고 싶은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을 책 앞으로 불러 모으고 싶어요. 책 속에서 자기 안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걸, 우리는 연약하지만 연결되어 있음을, 걸으면 반드시 자신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읽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명랑하고 가볍게 '나도 나를 만나러 나가서 걸어볼까?', '딸아, 이번 방학에는 학원 대신 산티아고 걸을까?'라고 마음먹게 하는 용기를 받으시면 좋겠어요.
순례길을 다녀온 뒤 걷기가 일상이 된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순례길을 다녀왔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닐 텐데요. 순례길 이후 걷는 이야기 특히, 걷고 싶은데 일상의 루틴으로 들이지 못하는 분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김항심 : 몸을 움직여서 공간을 장악해 보면 삶을 대하는 감각이 달라져요. ‘어, 삶을 내 힘으로 주도해 갈 수 있잖아?’ 이건 몸의 세계에 들어오면 알게 되는 사실이거든요. 물론 지루함과 게으름이라는 길을 참고 건너야만 해요. 비법은 없어요. 가장 좋아하는 움직임을 발견해서 어떻게든 재미있게 해내는 것밖에는요.
태윤 : 저는 요즘 누워있는 것이 더 좋아지기 시작해서 팁을 드리기가 민망한데요. 그래서 저와 같은 고민을 한 분들이 있다면, 새롭게 다짐을 함께 해보고 싶어요. 일단, 어디든 걸어서 가보자고요. 기운도 남고, 시간도 많고, 날도 좋은 날이라면 아주아주 멀리까지도 가보자고요. 여름은 땀 흘리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에도 좋은 계절이니까요.
다음 걷기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두 분 같이 가실 건가요?
김항심 : ‘개인 김항심은 혼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 한다’라고 태윤이가 내준 숙제가 있어요.(웃음) 나답게 때가 되면 훌쩍 떠날 거예요. 내년이면 쉰인데요. 50대를 멋지게 맞이하는 시작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하고 싶습니다. 거기서 완경 선언도 하고 '독립 만세'도 외치고 오려고요.
태윤 : 저 역시 혼자 걸어보고 싶어요. 둘이 걸었던 길을 각자 걸으면 어떨지 정말 궁금해서요.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름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디든, 언제든, 훌쩍 떠나 걷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태윤 열네 살에 자발적으로 학교를 나왔다. 열다섯 살에 중·고등 검정고시를 치른 뒤 할 일을 못 찾고 방황하다가 열여섯 살에 엄마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걸었다. 나를 소개할 말의 부재 속에서 ‘학교 밖 청소년’이란 말을 찾았고 ‘순례자’라는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김항심 마흔여섯의 나는 걷기와 읽기와 쓰기를 사랑했다. 마흔아홉의 나는 걷고 읽고 쓰는 일과 더 힘차게 연애 중이다. 내 앞에 놓여있는 무수한 길들과 깨끗한 문장들 위를 계속 걷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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