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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얼렁뚱땅 논픽션 쓰기 (4)

<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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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는 달라야 했다. 이 책은 무엇보다 기술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진짜 경험을, 구체적인 삶의 결을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책이었기에, 적어도 이 논의가 저자인 나를 소외시키지 않아야 했다. (2022.06.29)


K는 글을 다 읽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아니야. 이건 너무 과해.”

K의 말에 따르면, 추가된 내용이 독자의 몰입을 돕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불평불만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그럼 그렇지. K의 ‘과하다’는 표현 하나로 내가 내 원고에 느꼈던 거리감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독자를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내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지나치게 부풀린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추가된 경험들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다. 삑, 이번에도 탈락.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써야 나를 적절히 드러내면서도 과한 느낌을 주지 않고,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중심에 두되 더 넓은 곳으로 뻗어 나가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초고를 고치고 또 고쳐 쓰면서, 경험을 넣었다가 빼고 다시 넣으면서, 나는 조금씩 문제의 원인을 깨달아갔다. 초고가 독자의 몰입을 끌어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경험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글을 쓰던 나조차도, 책에 소개한 많은 사례와 내 이야기를 여전히 떨어뜨려 놓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의 경험이 이 글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 수밖에. 그 시점까지도, 나는 장애를 나의 정체성으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는 달라야 했다. 이 책은 무엇보다 기술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진짜 경험을, 구체적인 삶의 결을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책이었기에, 적어도 이 논의가 저자인 나를 소외시키지 않아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내 이야기가 낯선 논의로 독자들을 이끄는 이 책의 ‘첫 사례’인 셈이니까.

초고를 수정하면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계속 던졌다. 나의 지난 경험 속에서, 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장애인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내가 직접 실감한 적이 있을까. 기계 장치와 상시 연결되어 혹은 접촉되어 살아가는 일이 매우 번거롭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 경험들은 지금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 중에 장애 중심적 과학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내 경험의 의미를 사후적으로 구성해나갔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그동안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던 나의 장애 경험을 되돌아보는 일이 되었다.



당사자성은 얼마나 중요한가.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던 당시에도 딱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장애 당사자라도 자신의 장애 정체성에 대해, 장애의 사회적 위치와 의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본 적이 없다면, 혹은 그 방향이 어긋나 있다면, 비장애인보다도 더 장애인을 혐오하고 차별할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 각자의 경험이 너무나 다르기에, 당사자성만을 무작정 강조하는 논의는 때로 파편처럼 흩어져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사이보그가 되다』와 같은 책을 꼭 당사자가 써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책을 쓰며 나의 경험과 장애 정체성을 진지하게 돌이켜보는 일이 꼭 필요했다. 자료 조사를 하고 글을 완성해가면서 내가 ‘장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바뀌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장애인을 차별받는 사람들이라고, 비장애중심적인 사회 때문에 부당하게 배제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규정할 때 장애는 여전히 부정적 정체성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장애 당사자이면서도 장애 정체성을 선뜻 받아들이거나 스스로 장애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여기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차별에 맞서 싸우는 장애인들, 부당한 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우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계속 접했다. 기술이 매끄러운 세계를 만들고 ‘당신들의 자리는 없다’고 말할 때 어떻게든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차별받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차별과 싸우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수정고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크립 캠프 Crip Camp: A Disability Revolution〉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기술과 장애라는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장애 공동체를 다룬 영화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 다큐멘터리는 1971년 뉴욕에서 열린 장애 청소년들의 ‘캠프 제네드’의 풍경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캠프에 온 십 대들은 그전까지 집과 시설에만 갇혀 살다가 이곳에서 놀라운 자유를 경험한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휠체어를 탄 채 운동 경기를 하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는 법을 배운다. 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이곳 캠프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가둬온 것이 자신의 장애가 아닌 세상 자체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더는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캠프 제네드를 거쳐간 이들 중 상당수가 어른이 되어 장애 차별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가 된다. 더 나은 세상을 한번 겪고 온 사람들은,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 각지의 도로와 건물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고 정부와 협상하며 권리를 쟁취한다. 더 이상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얼굴이 내가 책을 쓰며 알게 된 사람들의 모습과도 겹쳐졌다. 장애중심적 기술을 만들어가는 당사자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로 장애 권리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 한국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멈춰 세운 장애 활동가들.

그 많은 사람들과 내가, 국적도 장애 유형도 삶의 경험도 너무나 다른 우리가 ‘장애의 경험’이라는 느슨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게 문득 좋았다. 그들이 억압에 맞서 싸우는, 각자의 전선에서 세상을 바꿔온, 비장애중심적 사회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온 존재들이라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그제야 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에 ‘자긍심’을 지닐 수 있다는, 이상하고도 모순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의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따로 또 함께 쓰는 글

참고 문헌 목록을 작성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소설과 논픽션의 차이를 실감했다. 소설이 비록 기존 작품들의 영향 아래 있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나의 창작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 논픽션은 수많은 타인의 연구와 사례, 저술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글이었다. 책을 쓰면서 ‘이 자료가 세상에 존재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저작물의 공적인 의미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소설을 쓸 때는 주로 창작자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논픽션을 쓰면서는 지식의 공공성에도 관심이 생겼다. 창작자의 권리가 중요한 만큼 많은 저작물이 ‘서로’ 조금씩은 빚지고 있다는 인식도 필요한 것 같다. 어떤 개인이든 평등하게 책과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도서관의 존재가 새삼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고가 다른 저작물들에게 빚지고 있는 만큼, 작업 자체도 그랬다. 앞서도 몇 번 언급했던 연구자 K는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지만, 특히 장애학과 과학 기술학의 전문 연구 자료들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는데, K는 대학원에서 '장애-기술 관련 과학 기술학 연구'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 분야의 국내 몇 안 되는 연구자였다. 나는 이 분야의 자료를 처음 읽다 보니, A논문을 읽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B책을 읽으면 또 이 주장이 다 맞는 것 같고, 이래저래 줏대 없이 휘둘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해당 분야 연구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는 K는 내가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조언해주었다. 지금 인용한 논문은 이러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논문이고, 또 이 자료는 어떤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나온 논문이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맥락을 K가 명확히 짚어준 덕분에 나도 자료들을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비전문가로서 전문적인 영역을 소개한다는 점을 무척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K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너무 걱정을 많이 한 탓에 책이 안 나왔을지도 모른다.

편집자님과의 작업도 매우 재미있고 든든했다. 지금까지 경험해본 바,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문학 편집자님들은 본문 전개에 대한 피드백을 아주 조심스럽게 줄 때가 많았다. 어떤 내용을 삭제하거나, 전개를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거나, 장면 순서를 바꾸자거나 하는 코멘트는 꽤 드문 편으로, 아마도 한국에서는 소설이든 시든 작가만의 창작물이라는 인식이 좀 더 강한 편이고, 또한 자기 작품에 고집이 있는 창작자가 꽤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반면 논픽션 작업의 특징이겠지만, 『사이보그가 되다』의 편집자님은 과감한 제안을 자주 하셨다. 반복되는 사례 서술을 대폭 줄이자거나, 아예 결론을 다시 써보자는 제안을 주시기도 했다. 덕분에 첫 논픽션을 쓰느라 어깨가 굳어 있었던 나도 점점 더 편하게, 엇나가면 바로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원고를 고칠 수 있었다. 



사실, 이 과감한 본문 편집은 첫 소설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때도 경험한 것이었는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편집자님도 이전까지 인문 사회 과학 책을 주로 편집하시던 분이었다. 나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편집자님들과 특히 잘 맞는 것인지도…….

글을 몇 번 고쳐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여러 번 고쳐 썼다. 보통은 원고를 교정지에 앉힌 이후에는, 내용을 크게 손대기보다 오류나 일부 수정사항을 짚어내는 정도로 고치는 경우가 많다는데, 『사이보그가 되다』는 매번 주고받는 교정지가 너덜너덜해져서 원래 문장이 거의 남지 않았다. 김원영 작가의 교정지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잘 쓰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고칠 때마다 글이 나아지는 것이 나에게도 편집자님에게도 보여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막바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역시 김원영 작가와의 대담이었다. 대담은 이 작업에 대한 우리의 자가 피드백처럼 진행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글에 대한 생각과, 책에서 다 다루지 못한 논의와, 우리 작업의 한계를 이야기했다. 본문으로 쓰지 못한 고민과 아쉬움들이 대담의 형식을 빌리니 쉽게 흘러나왔다. 책 본문에 사진으로 삽입되어 있는 유화수, 이지양 작가와의 시각 예술 협업 역시 재미있었는데, 아마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일을 계기로 미술 분야의 협업을 좀 더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서도 분투했으나 많은 이들과의 협업이기도 했던 첫 논픽션이 세상에 나왔다. 여러 번의 인터뷰를 하고,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북토크를 다니고, 한동안은 아침마다 리뷰를 찾아 읽으며 뿌듯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는 했다. 논픽션이 출간된 해 가을에는 나의 두 번째 소설집도 나왔는데, 집필 시기가 겹치다 보니 수록된 작품들이 여러 문제의식을 직간접적으로 공유한다. 독자님들도 공통점을 발견했는지 “이번 소설집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사이보그가 되다』를 더한 것 같네요!”하고 흥미롭게 읽어주었다. 책은 점점 더 널리 읽히고 좋은 평가를 받아서, 교양 저술 분야에서 꽤 중요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십 년간은 논픽션 안 써야지.'

정말 어려운 일이었던 데다가, 아직은 나를 확 잡아당기는 다음 주제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반쯤은 진심이긴 하다. 그래놓고 이렇게 에세이를 쓰고 있으니 또 모를 일이지만.

그렇지만 어찌 됐든 첫 논픽션 작업이 나에게 알려준 읽고 쓰는 기쁨은 작가 생활을 하며 만나는 여러 좋은 것 중에서도 몇 안 되는, 빛나는 무언가일 것 같다. 나는 모르는 것을 쓰는 일을 예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 자신에 관해 솔직하게 쓰는 일에 조금은 더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의 글이 언제나 나의 것인 동시에 공동으로 쓰이는 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만 썼다면 아마도 알지 못했을 것들이다.

지금도 내 독서 생활의 상당수는 논픽션이 차지하는데,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맨 뒤의 ‘감사의 말’과 ‘참고문헌’을 대충 넘기지 않고 유심히 보게 되었다는 거다. 소설에 비해 논픽션은 거의 항상 이 부록이 긴 편이다. 어떤 책들은 가족, 친구, 출판 관계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터뷰이와 조언자와 연구자들을 언급하느라 감사의 말만 열 페이지가 넘어간다. 또 어떤 책은 참고 문헌이 본문 한 챕터보다 훨씬 두껍다.

그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우리 각자의 '앎'이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도 오직 홀로만 탁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다행한 일인지를 생각한다.



[예스리커버] 사이보그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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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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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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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초엽

소설가. 1993년생.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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