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최지인 시인, 땅에 발 딛고 선 시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인간은 왜 사는가’ 물었을 때, 그 답은 사랑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2022.06.03)
‘끝끝내 살아낸 최지인 시인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뮤지션 이승윤의 추천사처럼,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는 최지인 시인이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삶을 살아낸 기록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처럼, 시가 그리는 삶은 녹록치 않다. 직장 동료는 부당해고를 당하고, 사회 곳곳을 폭력과 죽음이 채운다. 그럼에도 땅에 발 딛고 일하며 ‘사랑’을 향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거듭 질문하며,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묶었다.
두 번째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가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2주만에 1만 부가 팔렸다는 수식어가 붙었는데요. 기분이 어떤가요?
굉장히 좋아요. 시를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이야말로 시인에게 가장 기쁜 일 아닐까요. 물론 좋다는 말에는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지만요.
어떤 감정들이 있었나요?
사실 잘 정리되진 않아요. 기쁨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됐어요. 시집이 많이 팔렸다는 건 제겐 이례적인 이벤트거든요. 친구(뮤지션 이승윤)의 추천사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글쓰는 사람은 늘 ‘다음’이 있잖아요. 앞으로는 홀로 자신을 증명해 나가야겠죠.
그 말을 들으니 작가님의 시가 왜 꾸준히 변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인간은 늘 변화하는 존재 같아요. 첫 시집을 묶었을 때와 지금의 제가 달라졌듯이 계속 변할 텐데, 이왕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해요. 그러려면 무던한 노력이 필요하겠죠. ‘좋은 사람’의 정의는 계속 변하잖아요.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도 달라지고, 실제로 ‘좋은 사람’처럼 보였던 인물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했죠. 저도 머물러 있으면 굉장히 이상한 방향으로 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정진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요.
2017년에 출간된 첫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와 이번 시집을 나란히 놓고 읽었어요. 생활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면서도, 현실의 문제가 좀더 밀착되어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쉽게 와 닿는달까요.
저는 종이책을 기반으로 고전적으로 활동하는 시인이기 때문에, 시집을 묶는 것이 한 시절을 매듭짓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한 권씩 낼 때마다 저라는 인간을 되돌아보게 돼요. 솔직히 이번 시집을 독자들이 쉽게 읽어주는 것에 놀라기도 했어요. 두 번째 시집을 읽고 역으로 첫 번째 시집을 편하게 읽어 주시기도 하더라고요. 제겐 신기한 일이에요.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시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시집의 화자들은 일하고 그 와중에 사랑을 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언제나 땅에 발 딛고 있는 작가이고 싶다고 생각해요. 작가마다 서 있는 위치가 다 다르잖아요.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작가도 있고, 지하세계에 들어가 내면을 바라보는 작가도 있고 역할이 다를 텐데요. 저는 기왕이면 현실 위에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홍콩 민주화 시위, 미얀마 민주화 운동,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 등 현실의 사건이 시에 언급됩니다. 이 사건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과 공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사회에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날 때, 당사자가 아닌 저는 어떻게 이 일들을 바라봐야 하나 고민이 돼요. 저는 활동가 정체성을 가진 분들처럼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제 위치를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사자가 아닌 저는 그 일들을 매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더 솔직하자면 좋은 집에 살고 싶고, 좋은 차를 몰고 싶은 욕망이 피에 흐를 정도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장애인분들이 이동권을 투쟁하고 있잖아요. 문득 나는 안전하게 살아가는데,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어요. 그럴 때 모순을 느끼죠.
시를 읽으면서 공감한 감정 중 하나가 죄책감이었어요. 방금 말한 모순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직장생활을 할 때, 부당한 일을 많이 목격했어요. 그런데 한번도 밥그릇을 내려놓고 같이 싸워주지 못했어요. 그건 비겁함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이기도 하겠죠. 당장 돈을 벌고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일을 한다는 건 뭘까 고민하게 돼요.
시 「세상의 끝에서」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화자는 직장 동료의 퇴사를 지켜보고, 노동 단체를 뛰쳐나와 살기 위해 이력서를 쓰죠. ‘일’이 고통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일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한다는 건 꿈꾸는 일인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대학 시절에는 사회에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꿈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장을 다니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면서 뒤늦게 이것도 굉장한 꿈이라는 걸 알았어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일이라는 단계가 필요한 거죠. 송경동 시인을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그가 “꿈꾸는 자 잡혀간다”고 쓴 적이 있거든요. 저는 그 말을 받아서 ‘꿈꾸는 자 시들지 않는다’고 쓰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을 포기할 수 없죠.
작가님은 시인으로서의 노동과, 직장인으로서의 노동을 병행하셨잖아요. 어땠나요?
시 「세상의 끝에서」에도 썼지만,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면 이루는 게 없다는 걸 느꼈어요. 그럼에도 시 쓰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죠. 또 다른 이유는 조금 이상적이에요.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어요.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절반 이상은 일한 경험이 있겠죠. 독자 대부분이 일한 경험이 있는데, 쓰는 사람인 제가 경험하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시를 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계속 일하게 한 듯해요.
무수한 일하는 날들을 지나야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이 시집에서 사랑은 일상에서 종종 반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89쪽) 하고요.
사랑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순간이 있죠. 제가 타인을 아프게 할 때도 있고, 사랑을 하다 보면 원하던 방향과 모양이 달라질 때도 있고요. 그럴 땐, 이것도 사랑인지 의심하게 돼요. 그럼에도 ‘인간은 왜 사는가’ 물었을 때, 그 답은 사랑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제가 시를 사랑하지 않으면 시를 쓸 이유가 없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많은 것을 사랑하려 애쓰는 것 같기도 해요. 시 「죄책감」에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16쪽)는 구절이 나와요. 창문에서 한 발짝 내딛으면 끝이 나겠죠. 그렇지만 반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게 사랑 같아요.
시집을 펼치면 맨 앞장에 표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요. 오디오북 혹은 점자 도서로 만들어질 때를 고려하여 직접 쓴 글이라고요.
장애인 문학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A의 모든 것>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는데요. 시각장애인인 손병걸 시인을 수행한 적이 있어요. 그 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어요. 하루는 시인이 책을 읽으시는 걸 봤는데, 중도에 시각을 잃으셔서 점자 대신 컴퓨터 낭독 시스템으로 책을 접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표지는 못 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시집을 만들 때, 적어도 이 분에게는 표지를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예전에 편집자로 일할 때, 동료가 레퍼런스를 보여준 적이 있었어요.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번 책에 시도하게 됐죠.
시에도 시인님과 관계 맺은 이들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계 맺기’는 제 글쓰기의 화두 중 하나예요. 제가 생각을 착착 정리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만큼 편견도 많아요. 고정관념을 해소하거나 확장할 수 있는 건 결국 낯선 이와 관계맺는 것이더라고요. 예전에 서울역 홈리스분들과 2년 동안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제가 상상한 모습과 실제 삶이 많이 달랐어요. 최근 이주배경 청소년, 여성분들과 교류하면서 제가 가진 편견을 되돌아보기도 했고요.
또 다른 화두도 궁금해지네요.
‘자기 기반의 글쓰기’도 중요해요. 언제나 제가 딛고 선 곳으로부터 글쓰기가 시작되었으면 하거든요. 지금 파주에 살고 있는데, 파주에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알고 보면 전국에 학살터가 정말 많거든요. 우리는 학살터 위에서 살아간다고 할 정도로요. 제 기반을 정작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가지로 조사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모두에게 안전한 공동체가 역사상 존재하기나 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 인터뷰에 제가 ‘좋은 사람’으로 담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을 조명할 때, 안 좋은 면은 소거해버리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저는 좋은 면, 나쁜 면을 모두 가진 사람이고, 거기에 솔직하고 싶어요.
*최지인 시인.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를 펴냈다. 창작동인 ‘뿔’과 창작집단 ‘unlook’에서 활동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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