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덕 시인 "두려움까지 사랑하고 싶다"
『액체 상태의 사랑』 김연덕 시인 인터뷰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행위가 저에게조차 무척 무용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때때로 내 안에 이해할 수 없는 숨구멍을 내어주는 일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2022.05.27)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21년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를 펴낸 시인 김연덕의 첫 번째 에세이가 ‘매일과 영원’ 다섯 번째 시리즈로 출간됐다. 사랑이 남긴 수치와 슬픔조차도 잊어버리기보다 기억하기를 택한 시인의 태도는 불꽃에 안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사람 같다.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그 마음에 몰두하는 김연덕 시인을 서면으로 만났다.
2018년에 수상한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소감으로 시작하는 『액체 상태의 사랑』은 등단 이후 시인님의 첫 에세이입니다. 제도를 통과한 시인이 된 이후의 일기를 담고 있기도 하고요. 등단 이후 글을 대할 때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시인으로서 등단 전후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작가 친구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고 외부에 글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하는 친구들도 꽤 있지만, 저는 제 글을 항상 보여 주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블로그에 공개 일기를 써 온 것도, 일기라는 형식으로 책 한 권을 묶은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등단 이후로는 어떻게든 글이 조금 더 멀리 닿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물론 다른 부담이나 무거운 감정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이런 ‘가닿기’로 가능해지는 가볍고 아름다운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 작가님의 일기와 함께 그간 발표된 시를 읽을 수 있어 좋았어요. 그 시를 쓸 수밖에 없던 이유와 마음에 대해 알 수 있어서 더욱요. 시인님의 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번 에세이가 더 반가울 것 같습니다. 에세이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은 어떤 마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에세이를 쓸 때와 시를 쓸 때의 마음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아요. 풍경이나 사람에 매료되어 나의 현재를 그저 휘발될 순간으로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을 때, 혹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것이 지금 당면한 중요하고 진지한 일로 느껴질 때, 그래서 그 순간들을 지연시키고 싶고 그것들의 정체를 알고 싶을 때 쓰는 것 같아요. 하지만 때로는 어떤 풍경의 세부들을 생략하면서는 쓸 수 없는 마음이 있고, 가끔 더 빼곡하고 자세한 현실의 언어로 옮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데, 이번 에세이를 정리하면서 이런 저의 마음에 대해 더 들여다보았던 것 같아요.
블로그에 일기를 쓰고 계신데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에 일기를 쓰는 것과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것에는 ‘어떤 결심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장 고민이 되었던 지점이나 출간을 염두하자 달라진 부분들이 있을까요?
고등학생 때부터 블로그에 꽤 오랫동안 공개 일기를 써 왔지만, 인터넷 너머로 제 일기를 읽어 주는 사람들을 현실적인 형상으로 상상해 본 적은 없었어요. 그들이 사람이라기보단 그저 조용하고 상냥한 정령들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아주 솔직한 일기 쓰기가 가능했고요. 수치스럽고 복잡하고 어두운 상황에 대해 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막상 저의 일기들(혹은 일기로부터 시작된 글들)이 모여 실물의 책이 된다고 하니 처음에는 긴장이 되더라고요. 서점과 도서관, 실물의 책상과 매대와 책 표지를 쥔 손가락들을 상상하니 이것을 ‘현실의 사람들이 읽는다’는 사실이 뒤늦게 자각되었다고 할까요.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세해지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략해야 할지 고민되기도 했고요. 산문집을 다듬으면서는 이런 기분들과 싸우기 위해 노력했어요. 사람들의 반응을 과도하게 의식하면 중요한 많은 것들을 다 놓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요.
날것의 제 모습을 다 보여 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아직도 제 일기가 출간되어 읽히고 있다는 사실에는 익숙해지지 않아요. 다만 삶과 사랑의 진짜 면모를 사랑하는 독자분들이라면 이런 제 개인적인 씨름들을 읽어 내 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시 쓰기 수업을 하면서 ‘행복하게 생동하는 나의 전체를 느낀다’고 하셨어요. 시인님께 있어 시를 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어떻게 같고 다른지 궁금합니다.
산문집에도 언급했지만, 가르치는 일은 쓰는 일과 거의 같은 무게로 저에게 의미가 큰 일인데요. 쓰는 일과 가르치는 일 모두 대상과 나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가 중요해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아요. 이때의 거리 조절은 꽤 까다로운 것 같은데요. 대상(학생)을 고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자기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둘 사이의 소통에 불이 붙으면 어느 순간은 대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고 우리가 양방향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느껴져요. 학생의 말로 가능해지는 저의 다음 말이 있고요. 다시 저는 그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 제가 해야 할 말을 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 쓰기와 좋은 수업은 늘 이런 예측불허한 에너지의 교환 속에서 이루어졌답니다.
저는 사랑을 ‘환하게 죽어 있는 상태’라고 표현이 너무 좋았어요. 사랑에 얽힌 다양한 마음을 담은 문장들 중 시인님께서 서면으로나마 독자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요?
‘2021년 1월 13일’의 일기에 등장하는 대목인데요.
“사랑은 죽어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요즘이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얼마쯤 죽어 있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완전한 사랑 역시 얼마쯤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상처도, 모험도, 다른 대상에 대한 사랑도 차단된 고요한 상태, 한 자리에 누워 한 장면만 볼 수 있는 상태, 그러니까 환하게 죽어 있는 상태.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 죽어 있었으니까요, 대답할 수도 있겠지. 죽어 있었기에, 외부에 무감했기에, 같은 곳에서 다른 기쁨들을 매일 발견할 수 있었죠. 멈추지 않을 수 있었죠.”
위 대목을 같이 읽고 싶어요. 가고 싶었던 학교에 여러 번 지원하면서 들었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사랑의 감정에 대해 적었던 부분이에요. 저는 그 학교를 정말 사람처럼 사랑했거든요.
에세이를 읽으면 시인님의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세요. 차가워지지 않도록 해 주세요.’ 라는 시인님의 다짐은 지금도 유효하겠지요. 요즘은 어떠한 사랑을 다짐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그동안의 사랑이 애인이나 친구, 신, 장소와 사물들을 향해 있었다면 요즘의 사랑은 저의 삶과 일상들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출간 후 무척 분주한 주간을 보내고 있어, 한동안은 제 삶을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긍정하거나 사랑해 주질 못했더라고요. 바쁨의 감각, 나 자신이 지워지고 소진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의 감각 역시 사랑해야겠다고 느껴요. 제가 살아 있는 사람이기에 느끼는 감정과 감각이고, 삶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이들 그러니까 아직 제가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나 죽은 사람들, 사물들, 천사들의 사랑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이니까요.
독자분들께 이 에세이가 어떻게 닿길 바라시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행위가 저에게조차 무척 무용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때때로 내 안에 이해할 수 없는 숨구멍을 내어주는 일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슬프고 답답해서 혹은 너무나 벅차고 좋아서, 마음이나 감정의 무수한 경계가 지워지는 삶의 순간들이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내가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는 당황스러운 순간에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겹쳐 보는 일이, 같거나 다른 삶을 체험해 보는 도전이 저는 좋았어요. 제 책이 독자 분들께도 이런 기묘하고 다정한 무게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연덕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18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재와 사랑의 미래』가 있으며 곧 다가올 성탄절을 내 생일처럼 기다리고 있다. 겨울과 산책과 꽃을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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