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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한다는 허상

사람이 발전기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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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는 어느 면에서 성장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보내는 모든 여가 시간은 분명 즐겁다. 하지만 늘 뒷편으로는 효용을 생각한다. (2022.05.13)

언스플래쉬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지인들의 삶이 다양해졌다. 연락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대신 의도하지 않은 순간 예전 관계를 맞닥뜨린다. 신간 소식을 훑다가 저자 정보에서 익숙한 동창의 이름을 발견한다든지, TV 정보 프로그램에서 영양제를 홍보하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라든지, 뉴스에서 지역 축제에 놀러 간 가족의 인터뷰를 보면서 땡땡 씨가 언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지... 하고 근황을 알게 되는 식이다.  

삶의 궤적은 일직선이 아니어서, 멀리 갔다 생각한 사람이 잠시 같은 길을 걷기도 한다. 요새는 모두 유튜브로 수렴되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동창도, 고등학교 친구도, 업계 지인도 유튜브를 한다. 누군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가 보면 구독자 30명에서 30만 명까지 다양하다. 30만 명이라.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보다 구독자가 많다. 부럽다.

아니, 부럽나? 진짜로?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벌어들일 돈의 액수나 유명세는 부럽지 않다. '나도 유튜브나 할까'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냈다는 게, 그 결과물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게 부럽다. 누군가 재밌는 결과물을 내는 걸 보면 '발전'한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유튜브나 할까'를 넘어서 다들 '나도 유튜브를 해야 하나'가 대세가 되자 모든 성장과 발전 과정이 점점 피곤해졌다. 모두가 영상 편집을 하고, 모두가 SNS를 하고 자기 자신을 알려야 하나? 그것을 발전이나 성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20대일 적에는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세상이 변하고 나는 그대로 서 있으면 점점 뒤처져서 누구도 나를 찾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든 조금 더 나아지고 싶었다. 자기계발의 고전 분야라 할 수 있는 영어 공부부터 시작해 운동, 재테크, 인간관계까지 어느 분야든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우리의 여가는 우리를 회복시켜주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이끄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재미도 없다. 친구들과 놀러 가는 것? 조율하려면 피곤하다. 데이트? 온라인에서 상대를 찾는 것도 고역이다. 파티? 준비할 게 너무 많다. 나는 토요일 아침마다 긴 시간 달리기를 하는 이유가 내가 달리기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달리기가 내 몸을 단련시킬 생산적인 방법이어서인지 헷갈린다. 내가 소설을 읽는 건 소설 읽기를 좋아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서일까? 이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밀레니얼 세대에게 만연한 번아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쉬는 시간이 일처럼 느껴질 때,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하기란 어렵다. 

_앤 헬렌 피터슨 저, 박다솜 역, 『요즘 애들』, 286쪽


아직 나는 어느 면에서 성장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보내는 모든 여가 시간은 분명 즐겁다. 하지만 늘 뒤편으로는 효용을 생각한다. 성악 레슨을 받으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발성을 하고, 결론적으로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주말에 사람들을 만나면 인맥이 넓어질 것이다.


번아웃을 해결하려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의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이 살고 싶은 인생, 당신이 찾고 싶은 삶의 의미와 결이 다르다는 착각을 지워야 한다. 번아웃 상태가 단순한 일중독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당신에게서 일할 능력을 뺏는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더 발굴해 낼 자아가 남아 있을까? 아무도 당신을 지켜보지 않을 때, 제일 저항이 적은 경로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때, 당신이 뭘 좋아하고 뭘 좋아하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_앤 헬렌 피터슨 저, 박다솜 역, 『요즘 애들』, 316쪽


탈력감은 발전하고자 하는 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나에게 가하는 채찍질 때문에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 때 온다.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간 사람을 (아직까지는... 아직도?) 떠받들어 주는 사회가 자기계발의 깊은 구덩이에 나를 몰아넣기란 너무 쉽다.

실로 내가 해온 모든 사이드 프로젝트는 나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나처럼 다른 일을 해보라고, 어느 부분에서든 조금씩 더 나아지려고 해보라고 말할 수 있나? 30대인 나는 20대 때보다는 나아져 있지만, 그저 나이가 쌓이고 연차가 쌓여서 이뤄낸 성과를 내가 노력해서 이뤄낸 성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20대 때보다 성격이 유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해졌다고 했을 때, 이건 그냥 호르몬 수치가 안정되면서 다른 사람에게 날을 세우는 경우가 줄어들어서 그런 건 아닌지? 

배우고 익히면 때로 즐겁다. 발전은 즐거운 일이다. 이 재밌는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사회가 요구하는 발전기형 성장을 강요하기는 싫다. 기후 위기도 덮어놓고 발전하다 보니 일어난 것 같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구를, 내가 나아지고 싶은 영역을 뺏기지 않고 잘 지켜낼 수 있을까. 답은 없고 피곤은 가까이에 있다.



요즘 애들
요즘 애들
앤 헬렌 피터슨 저 | 박다솜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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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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