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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천희란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천희란 저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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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란이 두 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로 돌아왔다. 붉은 색채가 돋보이던 기존 책들과 달리 세련된 현대미술 그림이 쓰인 이번 소설집은 제목부터 어떤 ‘변화’를 느끼게 한다. (2022.04.11)


2017년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로 제8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고 이후 주목받는 한국의 젊은 작가로 떠오른 소설가 천희란. 삶과 죽음, 여성과 예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렬한 언어로 표현해온 작가는 첫 소설집 『영의 기원』, 경장편소설 『자동 피아노』부터 이미 원숙한 언어와 자기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 천희란이 두 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로 돌아왔다. 붉은 색채가 돋보이던 기존 책들과 달리 세련된 현대미술 그림이 쓰인 이번 소설집은 제목부터 어떤 ‘변화’를 느끼게 한다.



두번째 소설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첫 소설집, 그리고 경장편소설을 출간하던 때와 또다른 기분이실 듯합니다. 소회가 어떠신가요?

앞선 두 권의 책을 출간할 때에는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무척 컸어요. 처음에는 계속 발표를 하고 출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고, 기회가 어느 정도 충족된 후에는 지속적으로 저만의 세계관이나 스타일을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고요. SNS상의 성폭력 말하기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를 경유하면서 거쳐야 했던 변화도 소설을 쓸 때 저를 자주 머뭇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에 묶을 작품들을 살피면서 제게 소설이 저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이상에 도달하는 것보다 삶의 변화와 자극을 성실히 살피고 지각하는 게, 그 도정의 의미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게 중요해진 것 같아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무엇에 천착하고, 어떻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많이 벗어났고요. 평가에 대한 기대나 불안보다 스스로 한 발 앞으로 걸어왔다는 감각이 주는 기쁨이 훨씬 커요. 그런 면에서는 더없이 홀가분합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작품인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은 발표되었을 때부터 큰 주목을 받은 작품입니다. 고딕-스릴러 장르인데다 기존의 여성 뱀파이어 소설 『카르밀라』를 새로운 시각으로 쓴 작품이기도 하죠.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는 2020년 현대문학상 수상 후보작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의도가 궁금합니다.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은 ‘여성-고딕-스릴러’라는 테마로 소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어요. 처음에는 소설적인 다른 욕심을 버리고 그저 재미있게 쓰고 싶었어요. 장르적 소재나 클리셰를 어떻게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로 사용할 수 있을지가 주된 고민이었고요. 어릴 적부터 뱀파이어가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뱀파이어와 고딕 소설의 공간적 폐쇄성 정도만을 염두에 두고 얼개를 만들어가던 중에 『카르밀라』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어요. 과거에는 여성 뱀파이어라는 인물이 매력적이라고 느꼈는데, 그들의 서사가 남성의 기록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이 주는 불편함에 더 오래 생각이 머무르더라고요.

고민 끝에 『카르밀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나 관계만을 일부 차용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뱀파이어의 전염성을 여성 간의 착취와 연대, 성적 긴장이 발생하는 ‘카밀라 수녀원’이라는 공간으로 변형하게 되었고요.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도 않고 전혀 다른 서사이기 때문에 완성을 한 시점에는 굳이 『카르밀라』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힌트를 남기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어요. 『카르밀라』를 읽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완결된 서사를 가지고 있고요. 그렇지만 그 흔적이 이 소설의 의미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최초의 뱀파이어 여성 서사로서 원작에 부여되어 있는 위상에 도전하고 싶다는 작은 야심도 품었던 것 같아요.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는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문학동네)의 문장을 인용하여, 한때 사랑했던 남자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다 읽고 나면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운동을 떠올리게도 하는 의미 있는 작품 같습니다. 표제작이기도 한 만큼, 작가님에게도 의미가 큰 작품일 것 같아요.

이 소설은 가공되기는 했지만, 자전적 소설에 가깝습니다. 문단 내 성폭력 말하기 운동을 지나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제 안에 스스로를 명백한 피해자로 규정할 수 없는 경험들이 뒤섞여 있다는 게 무척 고통스러웠어요. 제가 경험한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폭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 사실이 피해자로서도 연대자로서도 제 위치와 책임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어요. 이 소설을 쓰도록 추동한 가장 강력한 힘은 정확히 연대자의 자리에 서고 싶다는 바람이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제가 피해자인가 아닌가를 답하는 대신, 그것을 질문할 수밖에 없는 제 내면을 직시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폭력의 양상보다 그 상황에 연루된 자신의 욕망을 해부하는 것이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걸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지,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소설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한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제가 끈질기게 곱씹어왔더라고요. 정말로 단숨에 썼어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삶의 의미가 합의된 관념이 아닌 요약될 수 없는 구체성 안에 존재하고, 그게 제가 다른 무엇이 아닌 소설을 쓰는 이유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인용한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고심해 고를 필요조차 없었어요. 처음 읽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소설이었고, 어떤 문장을 옮겨 적을지 그때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느낍니다.

강화길 작가님의 추천사가 굉장히 압도적입니다. “이제는 악몽이 두렵지 않다. 이 사랑은 모두의 유산이 될 것이다.”라는 문장이 책의 카피로도 쓰였고요. 동시대 작가에게 듣는 찬사라 더욱 기분이 남다르실 텐데요, 동시대 작가, 특히 동료 여성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저는 언제나 지금 함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작품보다 큰 스승은 없다고 생각해요. 세계나 방법론이 완전히 다르더라도 현재라는 공통의 시간을 살고 있는 거잖아요. 동료들의 작품은 지금 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공유해주고, 제 소설이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 속에서 문학이 경쟁이 아닌 연대라는 기대를 품게 되죠.

저는 문학을 수학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여성으로서 저의 목소리를 억압해왔어요. 여성성이 인간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학습해왔던 거죠.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이 비슷한 종류의 억압과 싸우며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 작가들이 없다면 지금의 제 소설들도 존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저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강화길 소설가의 추천사는 문장 그대로도 압도적이지만, 제 소설 속에서 그 지난한 싸움의 흔적을 읽어주었다는 생각에 더욱 각별하게 여겨집니다.

소설집의 중간부에 자리한 「피아노 룸」 「살인자의 관」은 읽어나가면서 상당한 서스펜스를 느꼈습니다. 쓰시면서 작가님 본인이 즐겁게 쓰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작가님이 보아온 영화나 소설 목록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에는 특별한 장르나 주제에 대한 호오가 없는 편이예요. 소설을 쓰는 걸 업으로 했으니 취향을 떠나 다양한 작품을 편견 없이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영화도 다양하게 보기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호러 영화를 정말 좋아했어요. 어릴 적에는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미국 시리즈 공포영화를 무척 좋아했고, 다리오 아르젠토 같은 이탈리아 호러 감독들의 영화도 많이 봤어요. <노스페라투>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같은 몇몇 독일 표현주의 시대 영화들도요. 데이비드 린치나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작품도 꾸준히 좋아했던 것 같네요. 위협적인 존재나 잔인한 사건보다 상징적인 이미지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각적 효과들에 관심이 있는 편이어서, 소설을 쓸 때 종종 장르적인 문법을 활용해 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언젠가 준비가 된다면 정말 무서운 호러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기울어진 마음」과 「숨」에서 후배 여성을 바라보는 선배 여성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애틋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회한 같은 복잡한 마음도 느껴지고요. 지금을 살아가는 작가님이 한국사회의 현재를 기민하게 반영하고 계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중년이나 노년 여성에게 아주 조금씩 전형성에서 벗어난 역할과 서사를 부여하려고 해왔어요. 여성이 가부장적인 이성애 중심 사회와 불화한다고 하면 대체로 젊은 여성의 서사에 더 많이 주목하게 되잖아요.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라고 해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경험과 감정이 있다면, 그 경험은 현재적이죠. 중년 여성의 임신중단 경험이나 노년 레즈비언의 일상도 그런 맥락에서 쓰게 되었어요. 

만일 제 소설 속에서 젊은 여성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이 느껴졌다면, 선배 여성들이 그들과 여전히 같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젊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지혜를 전수하거나 이미 보수화되어 그들을 억압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갈등을 함께 겪으며 살아가는 연장자 여성의 삶을 더 많이 상상하고 싶습니다. 제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떠올리며 이전 세대의 여성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편, 세월에 길들여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계와 불화하는 아름다운 여성 인물이 언제나 제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반려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천희란 작가는 반려묘 ‘루이’, ‘아라’와 함께 살고 있다—편집자주). 인스타그램으로 올려주시는 글에서 두 고양이, 그리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꼼’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데요. 소설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는 시간에 더하여 반려묘와 함께하는 시간 또한 무시할 수 없이 큰 삶의 자양분인 듯합니다. 이들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고양이들은 제 안에 있는 사랑의 최대치를 매일 경신하게 만들어요. 상대의 무한한 행복과 건강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걸 해주고 싶은 마음 같은 걸 고양이들과 함께 지내기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어요. 소설가로서의 삶에도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저는 이 친구들을 잘 보살피기 위해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고양이는 사람의 행동이나 감정 변화에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에 이제 제게는 함부로 깊은 우울감에 빠질 권리조차 없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고양이들은 제게 우울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불안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고요. 감정적인 성숙을 경험하고 있어요.

생활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고양이들의 루틴에 맞춰 생활을 하다보니 낮에 작업을 하는 사람이 됐어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먹지도 자지도 않는 나쁜 습관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고양이들은 제 현실에도, 제가 꿈꾸는 삶의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어요. 물론 작업을 하는 시간과 고양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분리가 불가능해요. 고양이들은 항상 제 옆에 붙어 있으니까요!

올해, 또 앞으로 작가님이 발표하실 새로운 작품들이 기대됩니다. 앞으로의 집필 계획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작가로서의 포부도 환영입니다!

곧 잡지에 발표할 중편 분량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처음의 계획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것을 좋아해서 아직은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 앞으로의 포부라면, 제가 만들어온 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미리 한계를 설정하지는 않으려고요.



*천희란


201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영의 기원』, 경장편소설 『자동 피아노』가 있다.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천희란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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