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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K의 반쯤 빈 서재] 자가 격리 중에 읽은 책
<월간 채널예스> 2022년 4월호
지난 일주일은 내게 어떻게 기억될까. 접촉하는 것과 격리되는 것,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란 것, 나는 타인과 강력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 그리고 침묵의 시간들. 소리 내어 웃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나는 몰랐다. (2022.04.05)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처음으로 하루 10만 명을 넘은 날이었다. 오전 8시 18분, 내가 보건소로부터 확진 문자를 받은 날. 나도 그 10만 명 중 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부스터샷을 맞은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바이러스는 유유히 침투했다. 그것이 목구멍에 칼날처럼 박혀서 사흘간은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물론 일주일간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극심한 인후통과 피로감으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루 여덟 시간 꼬박꼬박 재택근무를 했고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으며 버텼다. 살던 대로 살 때 시간이 제일 잘 갔다. 오늘은 격리 마지막 날이다.
다행히 동거인은 음성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주의를 기울였다. 이걸 누구에게도 옮기지 않고 끝내는 게 제1의 목표였다. 내 손이 닿은 모든 곳을 그 즉시 소독하느라 바빴다.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됐다. 나는 오염돼 있으므로. 이 감각을 견디는 게 가장 어려웠다. 내 몸이 오염되었다는 것. 분투 중인 내 몸이 나에게도 낯설다는 것. 내가 누구에게든 이 더러운 것을 묻힐 수 있다는 것. 그 이유로 격리되었다는 것.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고립감이었다.
동지가 필요했다. 고립된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펼쳐 든 책은 흥미로운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고, 과연 고립감과 막막함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거기에도 있었다. 저자인 룰루 밀러에게 좋았던 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삶은 그에게 무의미, 무질서, 혼돈과 무력감을 깊이 가져다주었고 바로 그런 마음들로 가득하던 나에게 밀러는 좋은 동지가 되었나니. 난파선의 꼴로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밀러와 내가 이 책의 주요 인물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빠져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로 말하자면 물고기 수백 마리의 사체와 흩어진 그들의 이름표를 찾아 꿰기 위해 부리나케 바늘을 집어든 사람이었으므로. 지진으로 연구실이 다 엎어져 수년간의 노력이 한순간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 말이다. 회복 탄력성이랄지 정신 승리랄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요, 조던 씨. 주저앉아 울어야죠, 당신은 망했다고요.
밀러는 이 집념의 사나이에게서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리라 기대하며 온갖 자료를 파헤쳤다. 20세기 가열한 남성의 삶과 21세기 의구심 가득한 여성의 삶이 교차하며 책 속의 시간은 여느 모험담과는 다르게 흘렀다. (스포일러를 피해야 좋은 책이므로 거칠게만 말하자면) 초반의 영웅담이 하나하나 뒤집히며 다시 읽히기 시작할 때 이미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고, 반전을 거듭하는 조던의 삶을 통과해 자신의 삶을 뒤집어 보게 된 밀러를 마주했을 땐 눈물을 뚝뚝 떨구고야 말았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이 책은 여러모로 놀라웠다. ‘이름’과 ‘범주’,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책이었다. 조던을 통해 인간의 오만함을 새로이 조명하는 책이었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혼돈에서 벗어난’이 아닌 ‘혼돈과 함께’ 자유로워진 밀러가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느낀 고립감에 구멍을 뚫어 고투 중인 호흡기에 신선한 공기를 힘껏 불어넣어주었다고 할까.
기운을 얻은 나는 고립된 사람 가운데 내가 특별히 아끼는 여성을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벽』 속 이 세상 마지막 여성이다. 숲을 둘러싼 투명한 벽 너머의 세상이 어느 한순간 폐허가 돼 있고, 벽에 갇혀 외려 안전할 수 있었던 사람. 개 한 마리, 암소 한 마리, 새끼를 밴 고양이 한 마리가 그와 함께였다. 기이하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부드럽게 만들어가는 모습이 지금의 내게 도움이 될 터였다. 갇혀 있기에 더욱더 가능한 일 ━ 돌아보기, 잃었던 것을 깨닫기, 되찾기, 회복하기 ━ 을 그와 함께 해본다. “지금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이전이나 다름이 없다. 태어남, 죽음, 계절의 바뀜, 성장과 소멸. 벽은 죽어 있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 말하자면 벽은 내가 마음을 쏟을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벽에 관해서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지난 일주일은 내게 어떻게 기억될까. 접촉하는 것과 격리되는 것, 내 몸이 나만의 것이 아니란 것, 나는 타인과 강력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 그리고 침묵의 시간들. 소리 내어 웃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나는 몰랐다. 말할 수 없단 건 그리 불편하지 않아서 놀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목소리가 나왔을 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단 것까지 잘 기억해야지. 내 안에 새겨진 혼돈의 흔적과 함께. 이제 30분 후면 나는 자유다. 집에 쌓인 분리 배출 쓰레기들을 버리는 것으로 새날을 시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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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을 썼고 유튜브 채널 <편집자 K>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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