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술학원에 등록한 후 삶이 달라졌다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 이경주 저자 인터뷰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바쁘게 살던 아저씨가 어느 날 미술학원에 등록하고부터 1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겪은 일과 감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2022.03.28)
지금 내게 필요한 ‘행복의 도구’는 무엇일까? 아직 이런 의문이 들지 않았다면 현재 나의 생활에 불만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마흔이 넘은 아저씨(아줌마도 어쩌면 마찬가지겠지요)라면 그 이유가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바쁘게 살던 아저씨가 어느 날 미술학원에 등록하고부터 1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겪은 일과 감정을 기록한 책이다.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며 얻은 삶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더군요. 어떤 분야든 깊이 좋아하면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걸까요. 그림을 시작하기 전과 후 삶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깨달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게 그림을 그리는 건 일기를 쓰는 것과 같았습니다. 평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 몸 마디마디는 어떤 상태인지, 내 마음은 건강한지, 회사의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인지 등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들을 사뭇 진지하게 자문했습니다. 흰 도화지는 스트레스의 배출구였고, 정신감정 테스트기였고, 일상 도피를 위한 여행지였고, 나를 돌아보는 야간 캠핑장의 촛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간은 ‘열심히 일했다’에 보람을 느꼈다면 그림을 그리며 ‘잘 쉰다’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림의 정적인 매력은 명상이나 요가 같은 것으로 이끌었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미술관이나 공원 한켠을 찾는 즐거움도 알게 했습니다. 잘 살려면 ‘열심히 하지만 여유롭게’처럼 상반된 것들을 조율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수준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하기 힘든 것 같아요. 작가님만의 ‘성실함’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을 텐데요. (그림을 위해 일주일 동안 시간을 얼마나 들이는지도 궁금합니다. 어떤 그림 도구를 가장 좋아하는 지도요)
솔직히 ‘꾸준히’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취미도 어느 정도까지는 지루한 순간을 넘겨야 즐기게 되던데, 과거에는 늘 그 부분에서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 경우 나름의 성실함은 절실함에서 나왔습니다. 15년이 넘는 기자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번아웃이 찾아왔고, 필사적으로 도피처가 필요했습니다. 매일 마감이 있는 직업이니 습관처럼 붓을 드는 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1주일에 그림에 들이는 시간은 화실에서 2~3시간과 집에서 2~3시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푹 빠질 땐 짬이 나면 뭔가 낙서를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시간의 길이보다 얼마나 깊게 집중하느냐인 듯합니다. 어떤 때는 한 달간의 여행보다 햇빛 좋은 나무 아래서 책을 읽은 1시간에서 훨씬 큰 여유를 얻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수채화를 정말 좋아하는데 분사기로 물을 뿜은 뒤 작은 물방울이 도화지 위에 앉은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조악한 실력으로 색을 입히는 게 외려 미안할 정도로 순수한 순간입니다. 이런 작은 즐거움도 그림을 꾸준히 그린 이유인 듯합니다.
책 속에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하는데요. 피카소, 호크니, 터너, 로트렉, 뒤샹, 고흐, 이우환… 어떤 화가를 가장 좋아하는지, 또 좋아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롤모델로 생각하는 화가가 있는지요?
사실 그림 자체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아서 답변하기 망설여지네요. 청년시절에는 혁명의 뒤샹이나 새 조류를 창조한 피카소를 존경했고, 기자가 된 뒤에는 로트렉의 ‘삶의 날 것’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림을 직접 배우면서 호크니나 터너, 고흐 등의 독창적인 표현법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지금은 이우환 선생의 작품을 보면 이른바 ‘불멍’을 때립니다. 흔히 ‘표현으로서의 침묵’이라고 설명하던데, 개인적으로는 평생 수없이 날을 두드린 대장장이의 마지막 작품 같습니다. 세상 가장 날카로운 날이 아니라 다음 대장장이에게 남길 쇠망치 같은 느낌입니다. 단색의 선이 보여주는 율동성은 ‘완성’이란 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저 선을 그리는 순간에 무아지경에 빠져있을 화가의 마음을 전달받는 기분인데, 말을 넘어서는 부분이라 더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오랜 시간 신문사에서 일하며 쌓은 경험이 그림을 그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는지요? 기자라는 직업은 완벽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도 마찬가질까요?
기자로서의 완벽욕은 사뭇 방해도 되고 한편 도움이 된 것도 같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이 상대적으로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으니 그림의 소재를 얻는 데는 큰 도움이었죠. 생각의 꼬리를 끈덕지고 물고 늘어지면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도 도움이 됐죠. 하지만 그림을 취미로 즐기는 데는 방해도 됐습니다. 취미 그림이라는 게 즐기면 그만인 것을 숙제에 매달리다가 쉽게 지치기도 했고, 뭔가 너무 잘해보려다 화실을 가는 게 다소 부담스러워진 적도 있었죠. 업무와 취미는 완전히 다른데, ‘그냥 즐기자’는 초심을 잊고 과도하게 집착하다가 적지 않은 부작용을 겪었던 거죠.
어떤 분야든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게 중요하겠지만, 특히 미술이나 예술 분야에서는 특히 더 그런 듯합니다. 책 속 작가님의 선생님은 굉장히 훌륭하신 분 같아요.(가까이 계시다면 등록하러 가고 싶네요) 수업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선생님의 충고는 무엇이었나요?
한 가지 일을 오래하면 ‘도사’가 된다는데, 맞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차분하고 말수가 적고 수용 가능한 만큼을 알려주시는 분이었습니다. 무언가 ‘틀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고, 그림 소재나 표현법 등을 학생의 개성으로 존중하는 폭이 상당히 넓었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그대로 두는 게 낫겠어요”였습니다. 조금 더 실제와 닮은, 조금 더 색감이 좋은 그림이 될 수 있겠지만, 선생님은 제가 그린 의도를 듣고는 간혹 그렇게 말했는데, 비틀즈의 〈Let it be〉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삶에서도 알고 보면 ‘그대로 두는 게 더 나을 때’ 꽤 있잖아요.
“완성이란 사람들이 수고를 마치고 싶어 일직선상의 시간에 만들어낸 가상의 시점일지 모른다”라는 문장에 마음에 와닿더군요. 저도 실제 완성과 ‘수고를 마치기 위한 완성’의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많거든요. 그림을 그리며 또 끊임없이 완성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 정도면 붓을 놓아도 되겠다는, 완성에 대한 작가님만의 규칙이 있는지요?
사실 삶에서 완성이란 주로 타인의 기준이 정하는 거잖아요. 기사의 완성은 초벌 기사를 본 상사의 질문이 끝났을 때고, 디자인의 완성은 소비자의 만족일 테죠. 취미의 매력은 ‘내가 완성을 정한다’는 것 아닐까 싶네요. 선 하나를 긋고 거실 액자에 걸어놓아도 되고, 완성했다고 걸어두었던 그림을 다시 내려서 보충해도 되고요. 어떤 때는 졸려서 완성으로 치고, 어떤 때는 뭔가 더 그렸다가 외려 그림에 마이너스가 될까봐 완성을 맞기도 하죠.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완성을 선언하면 된다는 것에 대해, 소로는 『월든』에서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숙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남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꿔야 하는가”라고 썼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저를 포함한 중년 남성 대부분 ‘인생의 공백’에 대해 생각지 않는 듯해요. 중년이 되어서도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두려움 때문에 우울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을 몰아내는 것’은 시도조차 못하죠. 먼저 미술이라는 길을 찾은 선배로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이들에게 조언해주세요.
저라고 다를 리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열등감을 느끼고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 조바심을 냅니다. 다만, 사춘기가 지나가듯 인생에서 ‘치열한 경쟁’도 지나가는 통과의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후에는 무언가 버리고 정리하고 떠나야 하는 시간이겠죠. 그래서 지금을 조금 더 건강하게 지내고 미래를 좀 더 편안하게 맞이하기 위한 연습이 필요할 테죠. 돈을 버는 기술을 습득하는데 수많은 시간을 쓴 반면 인생을 운영하기 위한 연습에는 인색했던 것 같아서, 취미를 통해 진짜 노후준비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쓰고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공감하는 것만으로 저 역시 힘을 얻을 것 같네요.
*이경주 연세대에서 영문학·심리학을 전공했고 동국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배우는 것만큼 머리 비우기를 좋아한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산책을 즐기며, 이 밖에도 자동차 없이 살기, 빌려 쓰기 등을 실천하는 슬로 라이프 지지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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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아저씨가 무슨 그림이냐고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취미를 갖고 싶었다.” 나이가 들어도 사는 게 여전히 갈팡질팡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40대 평범한 직장인의 일과 삶, 취미에 관한 이야기 [서울신문] 이경주 기자는 몇 년째 미술을 배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기회로, 용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