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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K의 반쯤 빈 서재] 어느 날 서점의 문이 열리고 당신이 들어왔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3월호
그렇게 당신은 집 근처 동네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첫 순간, 첫 장면에 집중하자. 책의 양감, 서가의 빽빽함, 눈으로도 느낄 수 있는 표지의 질감들, 서점 특유의 냄새와 공기. 수많은 책이 한 프레임에 담겨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오고, 낱낱의 책은 당신에게 각기 다른 가능성이 된다. (2022.03.04)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 〈편집자K〉에 새로운 코너가 생겼다. 이름하여 ‘서점 사용법’. 구성은 간단하다. 게스트를 초대해 한 시간 동안 10만 원어치의 책을 고르게 한 뒤 내가 결제하는 장면까지 담는 것. 현재 소설가 정지돈과 편집자 김화진의 ‘서점 사용법’ 영상 두 개를 업로드했다. 애초 생각한 것은 나의 취향, 나의 서재로 한정된 채널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서점 풍경을 영상에 많이 담고도 싶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얘기지만, 책은 생필품이 아니기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 떠올리기 쉽지 않고, 여기저기 서점이 많아야 지나다 들러 구경도 하고 구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점이 많이 줄었으니 영상에서라도 자주 서점의 분위기를 노출하자는 마음이랄까. 우선 내가 좋아하는 서점의 목록을 적어본 뒤 그 가운데 게스트와 어울리는 곳을 골라 영업 전 한 시간을 빌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몰랐던 책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나부터 좋았고, 구독자분들도 재밌게 감상한 것 같았다. 소설가와 편집자는 서점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고르나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고.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싶어졌다는 피드백이었다. 아마 두 사람의 표정 때문이지 싶은데, 각자 고른 책은 매우 달랐지만 두 사람이 책을 한아름 안고 즐거워하는 표정만은 닮아 있었던 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 나도 저 표정 아는데, 나도 오랜만에 저 표정을 짓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들었으리라.
그렇게 당신은 집 근처 동네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첫 순간, 첫 장면에 집중하자. 책의 양감, 서가의 빽빽함, 눈으로도 느낄 수 있는 표지의 질감들, 서점 특유의 냄새와 공기. 수많은 책이 한 프레임에 담겨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오고, 낱낱의 책은 당신에게 각기 다른 가능성이 된다.
당신은 사냥꾼의 마음으로 서가를 일별한다. 흡족하다. 무해한 긴장감과 흥분이 당신을 조용히 휘감는다. 서가에 당신이 아는 이름이 많을수록 당신은 득의양양해진다. ‘이것은 내가 아는 세계다.’ 사냥감이 뭐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리란 건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다. 그러다 당신은 한순간에 초심자가 되기도 한다. 모퉁이를 돌아 만난 서가에는 온통 낯선 얼굴들, 가본 적 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기도 하니까. 그건 그 나름 좋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당신은 입맛이 당긴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는 “서점에서 독자는 읽지 않는다.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다만 훑어본다. 대중없이 그저 되는 대로 살핀다. 그는 내용물을 탐독하지 않는다. 맛보고 들이마시고 냄새를 맡고 핥는다.”라고 보았다. 서점에서는 제대로 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만지기만 해도 책은 독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무게, 입자, 부드러움을 통해서 책이 전하는 목소리의 변화나 심정의 동요를 식별해낼 수 있다.” *책등을 눈으로 훑고, 한 권을 꺼냈다가 다시 꽂고, 표지를 매만지고, 휘릭 펼쳐 넘기고, 페이지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두 장 혹은 세 장을 한 번에 넘기는 일 역시 독서 행위에 포함된다(공교롭게도 모두 종이책 고유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다. 나는 종이책이 전자책보다 더 풍성한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읽는다는 것이 어떤 책을 읽고, 기호를 해석하고, 행을 뭉텅이로 훑고, 페이지를 독파하고, 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것만은 아니다. 저자와 독자의 추상적인 소통, 관념과 귀(耳)의 신비스러운 결합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지하철의 소음이거나, (…) 욕조에 담긴 더운물의 느낌, 잠들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서점 안을 서성이거나 어느 서가 앞에선가 목적 없이 멈추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팔을 뻗어 처음 본 책을,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열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사냥감의 배를 가르듯. 그 안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뛰는 심장이 들어 있고, 그것은 새로이 읽히기를, 그리하여 새로이 살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책의 탄생은 이 순간일지 모른다. 작가가 마지막 문장을 써냈을 때가 아니라. 편집자가 원고를 매만져 물성 가진 책으로 만들어냈을 때가 아니라.
지금 이 글을 동네 서점의 테이블에 앉아 쓰고 있다. 이따금 문이 열리고 마스크에 반쯤 가려진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책을 고르는지, 어떤 서가 앞에 오래 머무는지 지켜보면서. 내가 특별히 아끼는 책을 꺼내 든다면 그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피게 된다. 누군가, 언젠가, 깊은 감동을 받았던 문장과 이야기들이 고여 있는 곳. 그 공기가 당신을 자극했으리라. 그렇게 또 이어지리라. 나의 이런 상상 역시 이곳에 스밀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장-뤽 낭시 지음 | 이선희 옮김 | 길
** 『생각하기/분류하기』 조르주 페렉 지음 | 이충훈 옮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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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을 썼고 유튜브 채널 <편집자 K>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