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의 뒷면] 영어 문장을 교정보는 날이 올 줄이야 - 『하루 영어교양』
<월간 채널예스> 2022년 2월호
영어와 밀접한 책이고 서양 문화 상식을 다루지만 국내 저자가 쓴 책인 만큼 한국 독자들이 느끼기에 생소하고 신선할 만한 이야기를 담으려 애썼다. (2022.02.07)
책 만들 때 가끔 ‘책 나오면 꼭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이 책은 다 만들고 나니 중학생 시절 나에게 쥐어 주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피아노 선생님 딸이면서 엄마의 직장 동료 딸이기도 했던 경인이 언니에게 처음으로 영어 문장 읽는 법을 배웠다. 알파벳을 외거나 써 본 적이 없어서 소문자 스물여섯 개도 그때 처음 익혔는데, 이제 겨우 ‘b’와 ‘d’를 구별해 내던 나에게 언니는 영어 일기를 써 보자고 제안했다. 영어 못해도 아무렇게나 써 오면 틀린 건 언니가 고쳐 주겠다고, 고작 일곱 살 많았으면서 빼곡히 채운 일기장 뭉치를 보여 주었다. 영어보다 언니가 멋있어서 그때부터 1년 넘게 영어로 일기를 썼다. 그러면서 ‘숙어’라는 단어를 알았고 ‘go to bed’를 시작으로 ‘나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말 습관’ 같았던 숙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어 문장에는 우리말 쓰는 사람들의 생각이 담기고, 영어 문장에는 영어권 나라들의 문화가 담긴다는 말이 딱 맞다. 일기 마지막 줄에 ‘일기 다 쓰고 잠자리를 폈다’라는 뜻으로 “I wrote diary and opened bedclothes.”라고 써 놓으면 언니는 ‘go to bed’라는 관용어를 가르쳐 주었다. 미술 시간마다 움츠러들어서 “Today I think again I hate art.”(나는 오늘 내가 미술을 싫어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라고 써 가면 “I have no gift for painting.” 또는 “I don’t think painting is right for me.”라고 고쳐써 주었다. 재미있게 본 드라마 이야기를 쓰면 ‘soap opera’라는 단어를 알려 주었고, 간식거리를 가져가면 ‘potluck’이라는 말과 함께 포틀럭 파티라는 문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하나에 오래전부터 온돌 말고 침대에 누워 잤던 사람들의 관습, 마을 잔치나 품앗이와는 다른 방식의 일손 나누는 문화, 재능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와 배경 등이 녹아 있었다. 이 재미가 영어 일기 쓰기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영문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직장에서 책을 만들며 공교롭게 영어 숙어를 교정교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숙어 366개, 숙어를 포함한 영어 문장 366줄을 살피며 어찌나 불안하고 초조하던지. 내리 세 번을 보고도 제목이 『하루 영어교양』인데 영어 틀리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수 일치, 시제 일치’ 같은 기초 영문법을 되뇌었다. 복수 접미사 ‘-s’, 3인칭 단수 주어 뒤 동사에 붙는 어미 ‘-s’, 까딱하면 놓칠 것 같은 전치사들은 최종 교정지에서도 모두 두 번씩 확인했다. 한글 문장에서는 가리키는 사물이나 사건이 아무리 여러 개라도 불필요한 ‘-들’은 가급적 덜어낸다. 반면 영어 문장에서는 지칭하는 사물이 셀 수 있는 것이고, 하나가 아닌 경우 ‘-들’에 해당하는 ‘-s’를 빠뜨리면 안 된다. 서술어가 타동사인데 목적어가 없으면 비문일 확률이 높다.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an’도 틀리면 어색해지는 영문법의 기본이다. 당연한 것들이지만 그래서 지나칠까 봐 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리고는 원고를 이리저리 섞어 보았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한 페이지씩 보라고 만드는 책인데 기왕이면 독자가 ‘오늘 같은 날 읽고 기억하기 딱 좋은 이야기네’ 하고 느낄 수 있길 바랐다. 휴일과 절기, 기념일이 잔뜩 적힌 새 달력을 넘겨 가며 새봄 첫 공휴일인 3월 1일에는 ‘red letter day’(빨간 날), 만우절인 4월 1일에는 ‘cock and bull story’(거짓말) 꼭지를 가져다 놓았다. 노동자들의 일터에서 비롯된 표현은 5월 1일에, ‘고디바 초콜릿’ 엠블럼의 주인공인 레이디 고다이바의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은 2월 14일에 배치했다.
영어와 밀접한 책이고 서양 문화 상식을 다루지만 국내 저자가 쓴 책인 만큼 한국 독자들이 느끼기에 생소하고 신선할 만한 이야기를 담으려 애썼다. 언어와 지식은 애초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제목을 ‘하루 영어 공부’가 아니라 『하루 영어교양』으로 붙인 만큼 영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와 맞닿아 있는 지식, 말로 굳어진 서양 문화 상식을 전하는 책이 되도록 구성했다.
저자인 서미석 선생님은 오래전 번역가로 처음 뵈었는데, 얼마 뒤에 “번역을 20년 하고 보니 출판에도 관심이 생겨 편집자로 취업했다”고 하시며 나를 놀라게 하셨다. 그만큼 ‘책에 진심’이시지만 책을 쓰고 싶어 하시리란 생각은 못했는데, 묵직한 고전 번역을 제안하러 나간 자리에서 번역은 미뤄 두고 원고를 청탁하고 돌아왔다. 신화와 고전, 성경과 역사를 다룬 책을 많이 번역하다 보니 마치 유교와 불교처럼 서양 문화를 이루는 두 축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씀에 그 공부를 책으로 엮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번역하시면서
①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 각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관용구,
② 웬만큼 알려져 있지만 파고들면 생각보다 유래가 더 깊은 관용구,
③ 알아 두면 언젠가는 쓸모 있을 영어 상식과 서양 문화 상식을 기억나는 대로 끌어모아 달라 부탁드렸다.
그렇게 목차 초안을 정리해 보내시면서 선생님은 “신화와 성경만으로는 366일 치가 채워질 것 같지 않아 범위를 좀 더 넓혀 역사적 배경을 가진 어휘와 고전 작가들이 작품에서 처음 써서 이후 관용어로 굳어진 어휘도 추리고 있습니다.” 하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 결과 책의 저변이 신화, 성경, 역사, 문학으로 확대되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부터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 들의 논쟁, 근대 초기 토머스 모어나 셰익스피어 등이 발표한 시와 소설, 이솝 우화에서 시작된 2000년 묵은 속담과 영어 고사성어,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떠돌던 소문 등에서 유래한 말과 상식이 모두 모였다. 그러니 갈수록, 단어와 숙어를 외워 가며 영어 실력보다 영어 속에 담긴 사고방식과 문화 지식 쌓기를 흥미로워했던 때가 기억난 것이다.
진심으로 영어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영어에 자신이 없다. 숱하게 썼던 표현도 어렴풋하고 간단한 단어마저 아리송하고 헷갈린다. 영어 문장 읽는 속도도 예전 같지 않다.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영어 독후감과 과제물을 넘기다 보면 내가 쓴 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외국어 공부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꾸준함이라는 걸 몸소 증명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하루 영어교양』을 만들면서 이미 한참 멀어진 영어 때문에 애먹었지만 ‘아 나 영어 좋아했네’ 하고 깨달으며 영어와 치열하게 씨름했던 때를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독자들은 씨름하지 않고 하루에 한 쪽씩만 읽으면 되게 만들었다. 영어든 서양 문화든 문화 상식이든 하나에만 관심을 갖고 읽어 보아도 1년이면 셋을 다 얻을 수 있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책이 나오고도 영어 오탈자 신고가 들어올까 조마조마하지만, 영어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다며 편집자의 영어 실력 미숙을 짚어 주는 독자를 만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경험일 거다. 그런 독자 만날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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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편집자.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면 뭐든 해 보고 싶어 하고, 독특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말 어감사전』, 『끝내주는 맞춤법』, 『책의 말들』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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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교양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하루아침에 쌓을 수 없고, 풍부해질수록 더 깊이 사고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한 번 내 것으로 만들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루 영어교양』은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사용해 관용어가 된 영어 표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