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양다솔의 적당한 실례
[양다솔의 적당한 실례] 글과 이름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2월호
큰 일을 하기 때문에 큰 책상이 필요한 게 아니라, 큰 책상이 있어야 큰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기도 이전에 구독료를 먼저 받는 연재 프로젝트는 내 성향에 딱 알맞았다. (2022.02.04)
‘격일간 다솔’이라는 연재 프로젝트의 구독료는 만 원이다. 넷플릭스, 왓챠 플레이, 일간 이슬아, 디즈니 플러스가 이미 세상에 있었다. 그들의 구독료는 최대 만 원이거나 그것을 밑돌았다. 그 와중에 양다솔의 글을 받아보는 구독료가 만 원인 것이다. 요즘은 이런 경우를 ‘밸런스 붕괴’라고 부른다. 양다솔이 누군데? 나라도 그렇게 물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명작 <펄프 픽션> 포스터의 그림판 버전 같은 연재 홍보물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등단도 안 했고 책도 못 냈고 상도 못 받은 그냥 양다솔’. 셀프 PR의 시대에 그냥 양다솔이라니 속을 알 수 없이 당당하고 처연하다. 원작 포스터의 우마 서먼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담배라면 내가 쥔 것은 연필이다. 오마주란 힘을 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우마 서먼은 어둠 속에 혼자다. 아주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혼자다. 나 또한 그랬다. 좋은 의미이건 나쁜 의미이건 말이다.
그즈음 나는 성공한 친구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늘어놓는 취미가 있었다. 그 친구는 걸어 다니는 기업 같았는데, 그녀의 전화통을 몇십 분씩 붙잡고 얘기를 늘어놓으면 내 하소연이 비싸지는 기분이 들었다. 레퍼토리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변주됐지만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했다. ‘망해왔고 망하고 있으며 망할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가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망망대해의 작은 배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작은 배의 갑판에 서서 이마에 손차양을 드리우고 잔뜩 인상을 쓴 채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다. ‘이봐, 여기는 오늘도 가라앉고 있다고.’ 친구는 한숨을 푹 쉬고 세 살배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다솔아, 뭘 한 게 있어야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웃었다. 그게 수학적으로도 맞는 말이어서다. 실제로 하는 일이 0에 수렴했다. 집에서 밥만 해 먹으면서 놀고 있었다. “연재나 해 봐.” 그녀가 말했다. “그걸 누가 구독하는데” 나는 물었다. “더 망할 것도 없잖아. 오십 명 안 모이면 내가 오십 만 원 줄게.”
아쉽게도 그녀에게 오십 만 원을 받은 일은 없다. 나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한도는 딱 백만 원이라고 공언한 그녀가 그것의 절반이나 되는 금액을 걸었던 좀처럼 드문 기회였는데 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고 있었다. 영 곱하기 영은 영. 영 곱하기 오십은 영…
사람이 색깔을 닮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구독자가 늘어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과 정확히 비례하게 나는 하얘지고 있었다. 몸속의 피가 지면을 따라 흘러 지구의 핵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컴퓨터의 흰 화면을 마주하기도 전에 내가 흰 화면이 될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다리가 달달 떨렸다.
이 모든 일에 준비가 된 것은 거실에 놓인 짙은 갈색의 책상뿐인 듯했다. 아름답고 커다란 소나무 책상은 마치 이 날을 기다렸다는 얼굴이었다. 스타벅스에서나 볼 수 있는 묵직하고 거대한 우드슬랩 테이블이었다. 처음 이것을 들였을 때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과해. 너무 과해.” 나는 말했다. “흐뭇하잖아.” 가격이나 규모로 봤을 때 혼자 사는 여자나 돈 없는 백수가 가지는 것이 실례가 되는 물건이었다. 중산층 신혼부부가 혼수로 들이거나, 작가로 치면 전업으로 5년 정도 경력은 가져야 적당해 보였다. 나는 어느 날 당근마켓에서 그걸 샀다. 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집에 들여놓을 수 있는지 치수도 재보지 않았다. 애초에 1, 2인용 책상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들어갈 곳 없으면 침대로 쓰지 뭐, 나는 생각했고 순식간에 통장은 텅 비고 거실은 책상으로 가득 찼다. 그 풍경을 보며 소리없이 함박웃음을 웃었다. 매일같이 그 앞에 앉아 한참 그것을 쓰다듬었다. 예로부터 내 별명은 ‘돈지라르 사치스’였다. 무엇이든 물적 조건부터 마련하는 것은 나의 습성 중 하나다. 일종의 궤변이었다. 큰 일을 하기 때문에 큰 책상이 필요한 게 아니라, 큰 책상이 있어야 큰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기도 이전에 구독료를 먼저 받는 연재 프로젝트는 내 성향에 딱 알맞았다.
나는 까불고 있었다. 일간이 아니라 반나절에 한 편씩 보내도 시원찮을 판에 격일간을 선언했다. 감사함에 구독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찾아가 큰절을 해도 모자를 판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발송 시간은 저도 모릅니다. 재촉한다고 빨라지지 않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함께 행복합시다.”
“인재지변으로 인한 휴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응급실을 izi의 노래로만 기억하고 싶거든요.”
“혹시 심술 난 피드백을 보내실 시에는 다이다이 뜨자는 것으로 알고 링에서 만날 약속을 잡으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밸런스의 붕괴 따위는 아랑곳 않고, 그 별볼일 없는 이름 아래 기꺼이 돈과 이름을 내어주었다. 그냥 양다솔이 무릅쓴 실례의 결과였다. 그들이 본 것이 용기였다고 말해보고 싶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 봐.” 그 이름들을 먹으며 생에 가장 치열한 한달을 보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들은 모두 합죽이가 되었다. 나는 가장 초라한 나부터 가장 찬란한 나까지 모두 데리고서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용기는 우연처럼 얼굴을 비추었다. 반짝 하고 빛나다가 그만큼 짙은 어둠 속에 나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진 공간에는 글과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양다솔의적당한실례, 연재, 격일간다솔
글쓰기 소상공인.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