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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의 그림책 읽는 시간] 다비드 칼리의 『오랜만이야!』
<월간 채널예스> 2022년 2월호
나는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새집으로 이사를 왔다. 다음번 이사를 할 때도 나는 또다시 버릴 궁리를 하겠지만 백전백패하리라. 그렇게 물건은 쌓여가고 인생은 흘러가고 있다. (2022.02.04)
최근 이사를 해 대대적인 짐 정리에 나섰다. 필요 없는 물건을 잘 정리하는 편이라 여겼는데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쓸모가 다 됐는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집에는 무척 많았다. 나는 일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을 골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꽤나 아끼고 좋아했지만 한 해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추억이 깃든 물건을 버리는 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과감하게 버려야지 다짐했지만 아쉬움과 망설임이 나를 막아섰다. 그렇게 나는 내 오랜 물건들과 다시 마주했다.
구입한 지 25년이 넘은 샤프가 눈에 들어왔다. 필기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가 쓰는 걸 보고 나도 저렇게 공부해보겠다고 따라 산 물건이었다. 25년 전에 2만 원을 주고 샀으니 꽤나 거금을 투자한 물건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펜을 참 많이 좋아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숱하게 치렀던 중간, 기말 고사는 물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여겼던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이 펜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그렇게 많이 그리고 오래 사용했는데도 고장 한번 나지 않은 믿음직한 펜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이 펜과 멀어졌다. 휴대전화와 아이패드의 메모장이 아꼈던 펜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버려? 나는 차마 그럴 자신은 없었다.
이제는 개통조차 힘들 것 같은 생김새의 모토로라 휴대전화도 그랬다. 그 옛날 아빠가 쓰던 물건이었는데 이제 아빠는 더 이상 같은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아빠의 유품이기도 하다. 나는 아빠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었다. 내 기억이 남아 있는 그 순간부터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었고 속상한 일이 있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혹은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나는 언제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에서는 철두철미하고 냉정한 분이었지만 딸 앞에서 아빠는 언제나 다정했다. 모토로라 휴대전화를 통해 우리 부녀는 매일같이 서로의 정을 나눴다. 아빠와 나의 수많은 이야기가 이 모토로라 전화기를 통해 이뤄졌다는 게 이제는 잘 믿겨지지 않는다. 쓸모가 없더라도 이걸 버리면 아빠와의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나는 차마 이 휴대전화를 버리지 못한다.
라운드 목선이 강조된 분홍색 정장도 눈에 띄었다. 지금은 입지 못할 스타일의 옷이다. 대학을 막 졸업할 무렵 나는 처음으로 맞춤옷을 제작했다.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는 몸에 잘 맞으면서 나를 돋보이게 해줄 옷이 필요했다. 화려한 색감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이 화려함이 정체 모를 힘을 불어넣어 주리라고 믿었다. 나는 이 분홍색 정장을 입고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고 한 선배가 “언제까지 이런 공주 같은 옷을 입고 다닐 거야?”라고 지적하기 전까지는 중요한 날마다 이 옷을 입었다. 하지만 이제 이 옷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아이를 낳으면서 내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니게 됐고 그래서 더 이상 사이즈가 맞질 않는다. 그래도 이 옷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내 꿈과 청춘과 젊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분홍색 정장은 이런 설레는 단어들을 상징한다. 결국 나는 무엇도 버리지 못했다. 샤프도 그랬고, 모토로라 전화기도, 분홍색 정장도 마찬가지였다. 물건마다 그 시절의 의미가 있었고, 추억이 있었고, 지금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오랜만이야!』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남성이 등장한다. 동네에서 오랜만에 벼룩시장이 열린다며 쓰지 않는 물건을 내놓자는 아내. 하지만 남성은 생각한다. “안 쓰는 물건이라고? 뭘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내의 말을 따라 물건이 쌓여 있는 다락방으로 가본다. 하나하나 추억이 깃든 물건들. 버릴 물건을 찾으러 올라갔던 남성은 오히려 새롭게 쓸 만한 물건을 찾아낸다.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북, 자동차, 트램펄린, 장난감 기차는 남자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고 그리운 존재와의 연결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사를 하며 남편의 민방위 훈련복을 동의 없이 버린 게 마음에 걸린다. 자신의 젊음이 고스란히 담겼다며 소중히 여기던 군복이었다. 남편이 그 옷을 찾는다거나 입을 일은 앞으로도 없겠지만 그의 빛나던 시간을 내 마음대로 처분한 느낌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건을 사려고 하면 사야 하는 이유는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버리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버리지 않을 이유는 차고도 넘쳤고 사는 일보다 오히려 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새집으로 이사를 왔다. 다음번 이사를 할 때도 나는 또다시 버릴 궁리를 하겠지만 백전백패하리라. 그렇게 물건은 쌓여가고 인생은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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