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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K열 19번] 빛이 되고자 했던 그림자 - 변성현의 <킹메이커>
정치란 무엇인가
영화는 지금까지 현대사를 다루어 온 여타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역사극이 되었다. (2022.02.03)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
때는 1961년, 독재와 싸우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김운범(설경구)은 강원도 인제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도전 중이다. 지난 7년 동안 네 번의 낙선을 경험했지만 그는 포기를 모른다. 어느 날 그의 앞에 서창대(이선균)가 나타난다. 그는 “선생님은 열 가지 사안을 소리 높여 얘기할 때, 공화당 애들은 ‘빨.갱.이’ 딱 세 글자로 끝낸다, 우리도 장사꾼처럼 효율적으로 정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정치는 표를 버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마뜩찮아 하는 김운범에게 서창대는 스스로를 애기똥풀에 비유하며 읍소한다. “애기똥풀은 독초입니다만, 독을 치료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김운범의 책사로 일을 시작한 서창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인제에서 첫 금뱃지를 단 김운범은 다음 선거에서 목포로 지역구를 옮기고, 이 선거에서 서창대는 상대방 후보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거짓말을 퍼트려 김운범 캠프를 승리로 이끈다. 선거가 끝나고 김운범은 서창대를 경질하지만, 목포 재선에 도전하는 선거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다시 그를 캠프로 불러들인다. 민중의 힘을 믿고 정석대로 싸워서 새로운 사회를 열고자 하는 김운범과 그의 동지들은 민중을 마타도어의 대상으로 삼는 서창대가 불편하면서도,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돌아온 서창대는 온갖 ‘화려한 재주’를 부려 김운범을 3선 국회의원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빛과 그림자의 관계가 맺어진다. 김운범이 빛나면 빛날수록 서창대는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다. 김운범의 뒤에는 언제나 서창대가 있지만, 그는 공식직함을 가질 수도 공식석상에 나설 수도 없다. 서창대는 김운범의 이름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하는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빨갱이’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김운범이 이북 출신인 서창대를 키운다는 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창대에겐 김운범의 자랑스러운 동지로서 세상에 떳떳하게 나서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가 밝은 곳으로 나와 김운범 옆에 서고자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 바로 1971년 제 7대 대통령선거였다.
<킹메이커>는 한국 정치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실존 정치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1997년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룩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운범이다. 서창대의 모델은 1961년부터 1971년까지 김대중 옆에서 활약하면서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 등으로 불렸던 스핀닥터 엄창록이다. 그는 한국에 ‘선거 캠페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때 선거 전략을 처음으로 구사한 선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야당의 신성 김대중과 독재자 박정희가 세게 붙었던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갑자기 실종됐다가 선거가 끝나고 한 달 후 모습을 드러낸다. 정치판에는 그가 여당인 공화당 쪽으로 옮겨가 ‘영남 vs 호남’이라는 지역 구도를 만들어 결국 김대중을 낙선시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그저 “일이 있어 속리산에 있었다”고만 할 뿐, 사라졌던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영화는 그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적극적으로 상상한다.
71년 선거 이후로 50년간 대한민국을 동서로 분열시켰던 지역구도가 정말 엄창록의 작품이었을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화가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흥미롭다.
정치철학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 김운범 캠프에서 쫓겨난 서창대는 중앙정보부 이실장(조우진)의 제안으로 공화당의 선거를 돕는다. “김운범이 당선되면 영남인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헛소문과 “신라 vs 백제” 프레임을 퍼트리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당은 모두 호남 캐릭터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는 한국영화에서 유독 전라도 방언을 사용하는 깡패가 많은 이유에 대한 코멘트이기도 하다. 설경구가 공들여 재구성한 김운범의 언어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다. 김운범의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정치의 언어가 전라도 방언으로 흐르는 것은 물론 현실 고증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지역감정이라는 구닥다리 이데올로기에 기생해 온 한국 영화의 관습적인 방언 재현에 대한 일종의 메타 비평이 된다.
71년 선거 후 엄창록은 김대중을 평생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1988년 세상을 떠나는데, 영화는 이 시간을 회한이 서려있는 후일담으로 담아냈다. 광원으로 다가갈수록 짧아지고 광원에서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그림자 서창대와 그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김운범. 서로 사랑하면서도 같은 꿈을 꿀 수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 안에 변성현 감독의 시그니처가 진하게 새겨진다.
영화는 빛이 아닌 그림자, 김운범이 아닌 서창대에게 주목했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김운범의 입에 협잡의 언어를 단 한 마디도 얹지 않되, 그 역시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권모술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정사(正史)의 영역에서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나는 김운범의 얼굴은 서창대와 독대하는 야사(野史)의 순간엔 백라이트를 받으며 그늘진다. 빛은 반드시 스스로 그늘을 만든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리하여 영화는 지금까지 현대사를 다루어 온 여타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역사극이 되었다. <킹메이커>는 86세대와 ‘민주정부’의 정통성을 세우는 영화라기보다는, 정치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작품이다. 그게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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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