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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K열 19번] 통곡을 노래하는 멜로드라마 - 발디마르 요한손 <램>

반인반수와 사랑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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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의 제목은 ‘트롤’이 아닌 ‘경계’를 말하고, 다른 한 작품은 ‘위반’이 아닌 ‘램’을 내세운다. 그리고 후자의 영화는 건조한 형식 안에서 감정의 격동을 잡아내는 기묘한 멜로드라마가 되었다. (2022.01.06)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 영화 <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마에서 애절한 통곡 소리가 들리는구나. 라헬이 자식을 위해 애곡하노니, 어떤 위로의 말도 자식을 잃은 그에게 가닿지 않노라.”  _(예레미아 31장 15절)


때로 잘못 홍보된 영화는 관객을 찾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발디마르 요한손의 <램>(2020)이 그런 경우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잇는 A24의 호러”라는 홍보문구는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램>은 괴물성과 공포의 영역을 탐구하는 호러라기보다는 출생의 비밀과 어긋난 욕망, 복수, 그리고 자식을 잃은 자의 통곡을 노래하는 가족 멜로드라마다. 

 

반인반수와 사랑에 빠지다

아이슬란드 북부의 산악지대. 마리아(누미 라파스 분)와 잉그바르(힐미르 스나에르 구오나손 분) 부부는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새로울 것도, 신날 것도, 그렇다고 딱히 불만일 것도 없는 생활. 별 대화도 없이 매일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두 사람의 얼굴엔 쓸쓸함과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그들의 점선과도 같은 활동 뒤로 펼쳐지는 숭고한 자연 풍광은 목표 없이 흘러가는 인간적인 시간의 무의미함을 더욱 선명하게 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목장에서 키우던 3115번 양이 특별한 생명을 출산한다.

3115번의 새끼를 받아 든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처음엔 크게 놀라지만 이내 운명이라는 듯 새끼를 집으로 데리고 와 ‘아다’라고 이름하고 애지중지 키운다. 마리아의 얼굴엔 생기가 돌고, 잉그바르의 발걸음엔 기운이 스며든다. 자식을 잃은 3115번은 그렇지 않다. 매일 아다가 있는 방 창문 앞에 찾아와 서글피 운다. “자식을 위해 애곡”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예레미아 31장 15절을 의미한다.) 3115번만큼이나 마리아도 고집스럽다. 과거에 ‘아다’라는 이름의 아이를 잃은 적이 있는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 아다는 평범한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반인반수, 양의 머리에 사람의 몸통을 한 존재였다.

시간이 갈수록 마리아와 3115번 사이의 갈등은 심해지고, 마리아는 결국 3115번을 총으로 쏴죽이고 만다. 바로 그날, 마리아의 집에는 잉그바르의 형 피에튀르(비욘 홀리뉘르 하랄드손 분)가 찾아온다. 부부는 피에튀르에게 별다른 설명도 없이 자연스럽다는 듯 아다를 소개한다. 피에튀르는 당황한다. “저게 대체 뭐야?” 피에튀르가 묻자 잉그바르는 답한다. “행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튀르는 “짐승”을 조카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피에튀르는 부부가 잠든 틈을 타서 아다를 집밖으로 끌어내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아다의 사랑스러움에 설득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도저히 한 가족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네 사람은 서로의 곁에서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경계를 받아들이는

하지만 씻을 수 없는 죄 위에 세워진 가족의 행복은 아슬아슬하다. 아다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뿌리로부터 뜯겨 나와 정체성의 일부를 부정당한 채로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마리아와 잉그바르의 가족 안에서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은 위협으로 여겨진다. 처음 만났을 때 피에튀르는 아다에게 생풀을 먹인다. 그 장면을 목격한 잉그바르는 분노한다. 아다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한 것이다. 오해는 아니었다. 피에튀르 역시 아다가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악취미가 발동했던 것이므로. 하지만 그 일이 아다에게도 모욕이었을까? 몸통이 사람이므로 사람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마리아와 잉그바르의 매우 ‘인간적’인 해석이자 도착적인 믿음일 뿐 아닌가.

그리하여 <램>은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보다는 알리 아바시의 <경계선>(2018)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인간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와 인간으로 성장하고 인간으로 살아야만 했던 트롤에 대한 이야기. 아다 역시 인간의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 했다면 트롤인 티나(에바 멜란데르 분)와 마찬가지로 다른 인간들과 자신을 견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정상성과 쓸모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을 터다.

영화의 끝에 홀로 남겨진 티나와 달리 아다는 친 아버지와 대면하게 된다. 그 순간이 어쩌면 <램>의 가장 충격적인 순간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때문에 <램>은 <경계선>과도 결별한다. 티나를 통해 세계에 그어진 온갖 종류의 이분법적 경계를 위반하고 탐구했던 <경계선>과 달리 <램>은 그 구분을 받아들여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작품의 제목은 ‘트롤’이 아닌 ‘경계’를 말하고, 다른 한 작품은 ‘위반’이 아닌 ‘램’을 내세운다. 그리고 후자의 영화는 건조한 형식 안에서 감정의 격동을 잡아내는 기묘한 멜로드라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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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38 연구원.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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