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베이징 후통(胡同)에서 만난 서점들 - 심예원
에세이스트의 하루 34편 - 심예원
베이징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부지런히 서점들을 훑고 다녔다.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딱히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어도 그냥 서점이라는 공간, 그 안의 사람들이 좋았다. (202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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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부지런히 서점들을 훑고 다녔다.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딱히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어도 그냥 서점이라는 공간, 그 안의 사람들이 좋았다. 특히 베이징 뒷골목인 후통(胡同)과 서점이 만나면 매력이 폭발했다. 다양한 후통 서점에서 가끔 멍하니 앉아 있곤 했는데 활자 중독자인 내가 서점에서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그럴 때면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 청각, 촉각까지 총동원해서 공간을 인식하고자 노력했는데 그 시간들이 매우 특별해서 때로 이방인의 특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아주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베이징에 있는 삼 천여 개의 후통 중 가장 오래되어 ‘후통의 뿌리’라고 불리는 '좐타 후통'을 걸었다. 원대에 형성된 이 후통은 골목의 동쪽 입구에 벽돌로 지은 탑이 있다고 해서 '좐타'란 이름이 붙었다. 과연 아주 멀리서도 오래된 탑 하나를 찾을 수 있었는데 원나라 초기 승려인 ‘만송행수(万松行秀)’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라고 한다. 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탑을 품은 곳에 아름다운 서점 ‘정양서국’이 있다. 좐타 후통에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과 최고의 중드로 꼽히는 ‘금분세가(金粉世界)’의 원작자 장한수가 거처하던 공간을 지나 처음 정양서국을 만났을 때는 뭉클한 감동이 있었다. 후통과 탑, 역사, 서점... 사랑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올 때의 벅참이라고나 할까.
압도적인 공간을 만나면 누가 이런 곳을 만들었는지 찾아보게 된다. 최소 환갑이 지난 연륜 있는 학자에게서 나올 법한 아우라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정양서국의 창립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빠링허우(八零后_80년대 이후 출생자)다. 80后인 ‘최용(崔勇)’이 2014년 이 공간을 인수해 문을 열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의 청춘을 베이징 역사와 관련된 오래된 물건들을 모으는 데 쏟았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 정양서국에는 고서적, 옛 사진, 옛 지도 등 예전 베이징 문화와 관련된 서적과 물건이 가득하다. (책만 4만여 권이 있다고 한다) 베이징의 멋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나도 1936년 ‘Frank Dorn’가 그린 베이징 지도를 하나 구입했다. 정양서국은 2018년부터 출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주로 예전 베이징 사진들 같은 진귀한 자료들이다. 그러니 이곳은 단순히 ‘서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과거와 현재의 베이징을 품은 문화 공간’ 정도랄까.
베이징 대표 관광지인 ‘난뤄구샹’에서 뻗어나가는 후통 중 하나인 '후원은사 후통'. 원래 원나라 대사찰이었던 ‘원은사 뒤쪽에 있는 골목’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었는데 지금 사찰은 사라지고 현대 중국 최고의 장편 소설 작가로 평가되는 ‘모순(茅盾)’의 옛집이 있다. 이 후통에 ‘Poetic Books’를 표방하는 서점 ‘소중서방’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시집을 만날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다. 소중서방에서 처음 목도한 풍경은 안경을 추켜올리고 곧 시집에 빠질 듯한 눈빛으로 열중하며 시를 읽고 있는 어르신이었다. 이 풍경이 실로 생경하면서 따뜻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시를 읽는 사람 보다 읽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은 사회에서 시를 중심에 두는 위험한 도박 같은 서점을 만든 사람은 ‘彭明榜(팽명방)’. 그는 무려 24년 가까이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일했는데 은퇴 후에도 사랑하는 시와 늘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곳을 오픈했다고 한다. 소중서방은 현재 중국 시인들의 사랑방이며 문학 관련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는 장소다. 매일 오전 7시 30분, 위챗 공중 계정을 통해 시 한 편과 시인을 소개해 주기도 하는데, 이 서점의 위챗 계정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心上沒有詩, 就像地上沒有花朶. (마음속에 시가 없다면, 땅 위에 꽃이 없는 것과 같다)
동쪽으로는 대책란 거리와 가까이하고 서쪽으로는 유리창 거리와 이어지는 양매죽사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斜街’라는 명칭이 붙었다. 중화민국 시기에 이 후통에 7개의 출판사가 있었으며 문화 거리로 불렸다. 이곳에 시인이자 고서적 수집가인 ‘강심’이 14년 처음 선보인 독립 서점 ‘모범서국’이 있다. 문학, 예술, 역사, 건축, 디자인, 철학 등에 특화된 서점으로 시중 베스트셀러는 거의 없지만 흔치 않은 판본과 고서, 절판본 등을 찾을 수 있다. 이 서점 바로 맞은편에는 청말 민국 초기 고급 상업 오락 장소였던 청운각이 있다. 이곳에서 강유위, 담사동, 양실추, 루쉰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지금 보아도 민국 시대풍의 멋스러운 건물이다. 강심이 양매죽사가를 걷다가 청운각 맞은편의 건물을 보고, ‘그래, 바로 이곳이야!’하고 무릎을 쳤다고 하던데 그럴 만하다.
강심은 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점은 세계에 존재하는 외딴섬이다.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힘들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답답한 현실에서 도피해 다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잘 살아가고 있다고 확인받거나 혹은 위로받기 위해 종종 시내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외딴섬으로 가곤 하니까. 소개한 세 곳 외에도 아름다운 외딴섬들은 후통 곳곳을 지키고 있었고 쓸쓸한 이방인이었던 나는 때로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위로를 받았다. 도시를 판단하는 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서점이 많은 도시’가 대우받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후통을 걸으며 나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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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조금씩 걷고, 매일 조금씩 쓰는 도시 산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