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미료 - 손서윤
에세이스트의 하루 32편 - 손서윤
입 안 가득 퍼졌던 된장찌개의 비릿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초보 요리사의 첫 작품은 누가 봐도 완벽한 실패였다.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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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정말 맛있어요.”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첫째가 엄지를 세우며 엄마를 바라본다.
“그렇게 맛있어? 맛있게 먹어주니 엄마가 더 고마운걸.”
아이의 칭찬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학창 시절, 나는 요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1년에 1~2번 할까 말까 했던 요리 실습은 5명이 한 조가 되어 음식을 만들었다. 여러 명이 함께했던 요리 실습에서 채소 다듬는 기회라도 잡으려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생긴 요리에 대한 갈증은 35년 동안 내가 요리를 좋아한다는 착각을 하게끔 했다.
요리에 대한 착각의 늪에 빠져있었을 때는 틈만 나면 주방을 힐끔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첫 번째 요리를 시도했다. 학교에서 요리 실습으로 된장찌개를 끓이던 날, 하교하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던져둔 채,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국물 맛에 깊이감을 더하고자 작은 뚝배기에 멸치를 한 움큼 털어 넣고, 된장, 파, 마늘, 애호박, 두부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뒤 보글보글 끓였다. 짭조름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고, 그럴듯한 냄새에 의기양양해진 나는 멸치를 한 움큼 더 추가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뭐든지 넉넉하게 넣으면 맛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움큼의 멸치가 된장찌개를 얼마나 짜고 비리게 만들 수 있는지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의 첫 번째 야심작은 비린내 나는 된장찌개가 되었다.
입 안 가득 퍼졌던 된장찌개의 비릿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초보 요리사의 첫 작품은 누가 봐도 완벽한 실패였다. 아깝지만 이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며 버리려던 찰나, 엄마가 숟가락을 들고 그 짭조름하고 비릿한 된장찌개를 맛보셨다. “엄마, 드시지 마세요. 너무 비려요.” 놀란 눈으로 손사래 치는 딸을 뒤로한 채, 엄마는 맛있다며 된장찌개에 밥까지 말아 드셨다. 그 뒤로 내가 주방에 다시 선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신혼 초의 소꿉놀이 같던 살림도 시간이 지나니 한계에 부딪혔고, 그제야 내가 요리를 좋아한다는 착각이 깨지기 시작했다. 요리에 들인 노력에 비해서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손이 느린 탓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해도 해도 늘지 않던 실력은 요리에 대한 흥미마저 떨어뜨렸다. 요리에 공을 들이는 대신 간단히 챙겨 먹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가 되었고, 더는 요리를 거부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다. 우유만 먹던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주방에서 보냈다. 10mL의 이유식을 먹이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끌어모았다.
예전의 서툴고 무뎠던 칼질은 제법 모양이 나게 채소를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대로 ‘어떤 음식이구나.’라는 맛이 나도록 요리할 수도 있다. 뭇국과 미역국을 동시에 끓여도 더는 뭇국에서 미역이 발견되는 실수도 줄었다. 한 번에 가스레인지 위에 3개의 냄비가 올라가도 충분히 감당해 내는 실력까지 겸비했다. 요리 초보였던 내가 이제는 요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그동안 요리에 들인 노력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나만의 비법 조미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조미료만 있으면 어떠한 음식도 실패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친정엄마도 사용하고 계신 이 비법 조미료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입맛을 만족시킨다.
며칠 전, 친정 부모님께서 깍두기를 해오신 날이었다. 새콤하고 매콤한 것이 딱 내가 좋아하는 그 맛이었다. “어쩐 일로 이번엔 깍두기가 잘 됐어. 아빠가 먹어봐도 맛이 괜찮아.” 옆에서 반찬을 정리하시는 엄마를 보면서 아빠가 내게 윙크했다. 엄마가 만든 음식이 유난히 맛있어진 것은 엄마도 우리 가족에게 통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미료를 사용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네 장미가 그렇게 소중해진 건 네가 장미에게 바친 시간 때문이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가 나눴던 대화처럼 40년 넘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익숙함과 친근함이 음식 맛에 녹아 들어갔으리라. 서로에게 들인 정성과 시간이 음식 맛에 스며든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미료가 되어 음식 맛에 변화를 준다. 그 옛날, 내가 만들었던 그 비리고 짭조름했던 된장찌개에 밥까지 말아 드셨던 엄마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진다. 함께한 시간만큼 비법 조미료의 맛은 점점 더 완벽해진다.
나 또한 엄마가 만든 음식이 최고라고 말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주방에 서는 일이 즐거워진다. 때로는 하루 세끼 밥을 차리다가 하루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밥그릇을 싹싹 비우며 미소를 짓는 아이들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미료를 가지고 주방에 선다.
*손서윤 일상이 빛나는 글을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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