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희수네 갔다 올게!
현관문 안으로 책가방을 던져 넣고 위층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던 건, 우리 집에 없던 비디오 기계, 그러니까 VTR이 희수네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 앞 비디오 대여점에 달려가 새로 나온 <전설의 그랑죠> 3편을 빌려오면, 의례 희수네 아줌마는 토스트나 아이스크림을 내어주셨다. 나는 그렇게 엄마가 데리러 오기까지 희수네 집에서 비디오를 보며 보내곤 했다.
부모님은 무척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왜인지 VTR을 사진 않았다. 아마 빠듯한 살림 덕분이었을 것이다. 대신 종종 나를 데리고 시내에 있는 극장에 갔고 로보캅, 터미네이터, 에어리언 같은 장르에 한 획을 그은 SF영화들에 흠뻑 빠져서 오곤 했다.
토요일 저녁에 했던 <토요명화>는 그런 우리 가족이 손꼽아 기다리던 TV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은 토요일 밤 로또 추첨이 설레는 시간이지만, 당시 나는 아침 신문의 방송 편성표에 쓰여있는 <토요명화>의 상영작을 보는 것이 가장 설레는 순간이었다. 영화 제목을 본 엄마는 볼만한 영화인지를 판가름해주셨는데, 호평이 내려지면 하루 종일 <토요명화>를 기다리며 보냈다. 장엄한 오프닝 곡을 들으며 나는 티브이 앞 깔아놓은 이불 위에서 뛰어놀며 부모님과 영화를 보곤 했다.
아마 내가 기다렸던 건 정확히 한 이불 속에서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인 나에게 밤 9시에 시작한 영화를 다 보는 것은 무리였고 언제나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으며 아빠가 나머지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는 것이 직접 보는 것보다 더 재밌었다.
스물한 살에 휴학을 하고 집 앞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혼자 가게를 맡아보는 오전은 손님이 많지 않았고, 영화를 마음껏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노동강도가 낮은 만큼 시급도 낮았지만, 적당히 영화를 보며 용돈을 벌 수 있다는데 만족했다.
더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최신 비디오를 선점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가끔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하는 손님들이 있었던 점이다. 어렸을 적부터 쌓아왔던 나름의 업력(?)을 발휘하여 영화를 추천해주곤 했다. 물론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곤 다시는 추천을 요청하지 않는 손님도 있었다. 물론 추천해준 영화가 정말 좋았다며 비슷한 작품을 다시 추천해달라는 손님도 있었다. 그럴 때 가장 뿌듯했던 것 같다.
처음 보는 영화가 주는 기대감도 좋지만,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는 것도 괜찮은 휴식의 방법이다. 이미 알고 있는 서사이기 때문에 몰입하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덕분에 적당히 비스듬히 기대어 맥주와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힐끗거리며 봐도 좋다. 주로 술 약속이 끝난 후 피로하지만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주말 밤을 채우는 용이다.
21세기 들어 최고의 오컬트 명작으로 뽑히는 <유전>은 으스스 하지만 수많은 복선들이 주는 숨 막힘을 느끼고 싶을 때 본다. <인터스텔라>나 1997년작 <콘택트>는 일요일 밤에 보면 좋다. 광활한 우주와 미지의 세계를 다룬 영화를 보다 보면, 티끌만 한 지구의 생명체인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회사 가기 싫은 슬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위안이 된다. <반지의 제왕>은 서양 판타지가 주는 신비로움을 아름다운 영상 안에 담아두어서 언제든 틀어놓아도 시선을 강탈하는 작품이다. 굉장한 춤 실력을 보여주었던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는 70년대 디스코 음악의 흥겨움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빛이 듬뿍 담긴 영화다. 토요일보다는 토요일을 기다리는 금요일 밤에 주로 본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라는 책의 제목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재미없는 영화를 고르면 주말의 황금 같은 시간이 날아가기에, 빵 선택의 문제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문제다. 덕분에 하염없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넷플릭스 추천영화 목록을 넘기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사실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보던 시절에도 나는 비디오 대여점 가판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많은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덕분에 방법은 많이 달라졌지만 영화를 고르는 설렘도, 영화가 주는 즐거움도 여전하다. 토요일 오후, 오늘도 나는 맛있는 빵 같은 영화들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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