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짓는 사람] 최진규 포도밭출판사 대표 "아끼는 친구들의 책을 만들고 싶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2월호
"내가 만든 책이 손에 딱 쥐어졌을 때 보람과 쾌감을 아예 버리기는 힘들 것 같아요. 책 만드는 일에만 매진하기보다 저는 많이 두리번거릴 거예요. 하지만 계속 책을 만들 겁니다." (2021.11.30)
편집자 때문에 더 눈길이 가는 책들이 있다. 이 사람이 만들었으니 좋겠지, 믿을만한 책이겠지 싶은 확신. 포도밭출판사가 만드는 책이 그렇다. 최진규 포도밭출판사 대표는 기획, 편집, 교정교열, 디자인, 제작, 마케팅을 모두 직접 한다. 포도밭에서 만드는 책들은 외주로 진행되는 작업이 전혀 없는데, 최진규 대표는 타 출판사의 책을 외주로 받아 디자인하거나 교정교열을 맡는다. 올해로 출판 경력 17년차인 최진규 대표는 2014년 충북 옥천으로 이주해 포도밭출판사를 열고 24권의 책을 만들었다. 주로 펴내는 책은 인문, 사회과학, 문학 분야. 사명을 포도밭으로 지은 건 옥천에 포도 농가가 많기 때문이다.
“어릴 적 외삼촌이 옥천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셨어요. 그때 일손을 거든 적이 있는데 무척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또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이라는 책이 미친 영향이 있습니다. 예전에 녹색평론에서 일하면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요. 책, 텍스트, 독서 등이 가진 의미가 포도밭 이랑을 거닐며 수행하는 노동의 의미와 겹쳐지는 이야기를 읽는데, 무척 어지러울 정도로 인상적이었어요. 이 지혜로운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고 출판사 이름을 포도밭으로 지었어요.”
최진규 대표의 어릴 적 꿈은 천문학자였다.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찾는 걸 좋아했고 수학 공부도 좋아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사제가 되길 꿈꿨고 잠시 예비신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대학에 입학해 불문학을 전공했다. 두 평 남짓한 옥탑방에서 살던 시절, 그는 자신이 가진 물건이 책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찍이 책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대학 4년을 마치기도 전에 채용 공고를 이미 마감한 출판사에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렇게 처음 입사한 곳이 새움 출판사. 이후 바다출판사, 녹색평론사, 살림출판사, 현암사 등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마지막 출판사를 다닐 때, 여기에서 나가게 된다면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왕이면 지역에서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때 하승우 선생님과 풀뿌리운동에 관한 책을 내고 싶었는데, 하승우 선생님이 옥천으로 이사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갈래’ 그랬죠. (웃음) 파트너와 딸에게 처음에는 이렇게 말했지요. 옥천에 일단 구경이나 가보자고. 정하는 건 신중히 할 일이지만 구경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옥천 성당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햇살이 우리를 비추는 거예요. 여기다! 싶었죠.”
서울의 높은 밀도가 힘들었던 최진규 대표는 반대로 살고 싶었다. 서울을 구심으로 하는 활동에서 벗어나 지역 중심의 일을 시작했다. 옥천 포도 농사를 돕고 동네 청년들과 독서, 글쓰기 모임도 하면서 외주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면 종종 편집자에게 기본적인 조판을 시키거든요. 미술교육을 따로 받진 않았지만 책을 만들다 보니 나름의 취향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독립하기 전에도 책 만드는 걸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책이 나오면 제가 따로 시안을 만들어서 아는 편집자들에게 보냈어요. 필요하면 나를 찾아달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외주 다자이너로 활동하게 됐어요. 가장 최근에는 『비상구에서 지은 누구나의 집』을 디자인했어요.”
최진규 대표는 땡땡책협동조합에서 활동할 때부터 인디자인 강좌를 진행했다. 인디자인에서 책 만들기에 필요한 핵심 기능을 헤매지 않고 익힐 수 있는 교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 만들기 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서울과학기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출판과 편집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포도밭출판사는 2014년 5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53인의 소견서를 묶은 『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를 시작으로 『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 『광장이 되는 시간』, 『무명의 말들』, 『먼지의 말』,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등을 만들었다. 최진규 대표가 책을 기획하는 기준은 ‘내가 읽고 싶은 책’. 땡땡책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친해졌던 친구들의 책을 펴내고 싶었는데 실제로 김신범, 채효정, 박영길, 하승우 작가의 책이 포도밭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실제 제가 읽고 싶은 책,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글들에 마음이 가요. 옥천에 내려와 출판사를 열고 책을 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베스트셀러를 만들자는 생각은 못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어요. 독립 7년차가 되면서 포도밭도 좀 흥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내가 흥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 흥행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또 그렇진 않아요. 사업을 한다는 건 지속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일인데, 지금의 포도밭은 제 자력으로 꾸려가니까요. 제가 멈추면 다 멈춰진다는 점에서는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최진규 대표는 저자에게 책을 제안할 때 “나는 책을 많이 못 파는 사람”이라고 이실직고한다. 책에 날개를 다는 재주가 없어서, 마케팅을 잘하지 못해서 3쇄, 4쇄를 빠르게 찍을 수 없는 대신 저자에게 인세를 20% 줬고 지금은 15%를 주고 있다.
“말하면서 느끼는 건데 ‘우리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사실 웃긴 전제예요. 그런데도 포도밭에서 책을 내주는 저자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해요. 저는 저자가 원고를 늦게 줘도 ‘주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그리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자든 역자든 관계하는 누구든 만드는 일이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편이에요. 되도록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하고 원고가 미뤄지거나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도 ‘괜찮습니다, 이쯤의 일로 큰일나지 않습니다’라고 해요. 문제 해결이나 일이 잘되는 것보다 좋은 마음을 지켜나가는 일이 제겐 더 중요해요. 제가 잘못했을 때도 얼른 잘못을 고하고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애쓰는 쪽인 것 같아요.”
포도밭출판사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은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오후 네 시의 풍경』,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를 쓴 김정선 작가다. 최진규 대표가 현암사에서 편집자로 일할 때 김정선 작가는 교정 교열자로 협업을 많이 했다.
“김정선 작가님은 대학 선배예요. 문학 동아리를 같이 했는데 까마득한 후배들이 나오는 자리에도 합평하러 계속 나오셨어요. 그때부터 좋아하는 선배였는데 편집자와 교정 교열자로 만나 게 된 거죠. 선배가 글쓰기 책으로 유명해지셨는데 저는 오랫동안 선배가 블로그에 쓴 에세이를 좋아했어요. 에세이는 포도밭에서 내자고 제안 드렸고 흔쾌히 수락해주셨어요. 저는 이상하게도 저자의 킬러 콘텐츠에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이 은근히 숨기고 싶어하는 글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저희 저자가 다른 출판사에서 자신의 킬러 콘텐츠를 내도 서운함이 없어요. 그 책 덕분에 인세로 생활하면서 우리 책을 써준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감사해요.”
글만 보고 혹한 저자는 없었다. 글이 좋으면 일단 저자에게 접근한 뒤 친해진 후 이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글을 제안한다. 글이 아무리 좋아도 이 사람과 친해질 수는 없을 것 같으면, 책을 기획하지 않는다.
“좋은 글을 보면 본능적으로 섭외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이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친해질 수 있을까? 라는 그림이 안 그려지면 제안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기성 작가보다 신진 작가에 관심이 더 많은 편이에요. 포도밭출판사에서 첫 책을 내는 저자가 꽤 있는데요. 좋은 글을 쓰는 저자를 발견해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올해 4월에 출간된 『그을린 얼굴로 웃기가 왜 이렇게 어렵지』도 저자의 첫 책인데, 김예림 저자는 옥천 지역 청년들과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대학에 가지 않고 비수도권에 사는 여성 청년 노동자가 본 페미니즘을 기록한 에세이. 최진규 대표가 각별히 아끼는 책이기도 하다.
“지금 만드는 책은 대개 인류학 분야의 책이에요. 비베이루스 지 까스트루의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필리프 데스콜라의 『타자들의 생태학』을 편집 중이고요. 인간동물관계네트워크에서 기획한 책으로 『동물의 품 안에서』를 편집하고 있어요.”
최진규 대표에게 편집자로서의 꿈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1년 전이었다면 편집자로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답했겠지만 농사 일,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편집자 일보다 더 재밌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책을 만드는 일은 아예 내버릴 수는 없는 제 일부 같기도 해요. 모든 직업인에게는 어느 정도 그러한 감각들이 있겠죠. 축구선수라면 축구공이 발등에 착 감길 때의 짜릿함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고요. 내가 만든 책이 손에 딱 쥐어졌을 때 보람과 쾌감을 아예 버리기는 힘들 것 같아요. 책 만드는 일에만 매진하기보다 저는 많이 두리번거릴 거예요. 하지만 계속 책을 만들 겁니다.”
김정선 저 | 포도밭출판사
얼마 전 좋아하는 동네 동생과 만나 무알콜맥주를 마셨는데, 갑자기 자신의 휴대폰 알람을 보여주더라고요. 오후 4시에 알람이 맞춰 있었습니다. 이 책 뒤표지에 실린 요조 님의 추천사를 읽고 자신도 알람을 맞췄다고 합니다. 오후 4시에 알람이 울리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삼스레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의식을 합니다. 얼마 후 대전 버찌책방에서 김정선 작가의 다른 책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로 북토크를 했는데, 거기 와주신 독자 한 분도 이 책을 계기로 ‘오후 4시 알람’을 맞춘다는 걸 알려주셨습니다. 저도 당연히 알람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후 4시 알람 클럽을 창시한 요조 님까지 포함하면 세상에는 공식적으로 ‘오후 4시 알람 클럽원’이 벌써 4명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클럽원이 세상에 훨씬 많을 거라고 믿습니다.
김정선 저 | 포도밭출판사
이 책을 내고 매우 소소한 출간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김정선 작가의 반려식물인 연필선인장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분양했습니다. 김정선 작가와 제가 직접 웃자란 선인장 가지를 손가락 마디 길이로 가지치기했습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화원에 찾아가 조언을 듣기도 하고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했지요. 연필선인장은 김정선 작가가 책을 쓰는 동안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고마운 친구입니다. 이 연필선인장의 가지를 분양 받은 독자 분들이 나중에 화분에 삽목한 사진들을 보내주셨는데 그게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연필선인장의 가지들(이 가지들을 우리끼리 ‘몽당이’라고 부릅니다)이 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든든합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기획 | 포도밭출판사
집필 기간이 무척 길었던 책입니다. 기획을 다듬기 위한 회의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저자가 무려 열 분인데, 이 바쁜 분들이 한 번은 모두 옥천으로 놀러오셨어요. 장령산 휴양림에 방을 잡고 한참을 기획회의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저자 분들이 또 옥천에 오셨어요. 이번에는 읍내의 한 펜션에 방을 잡고 또 한참의 기획회의를 했습니다. 그러고 돌아가서 정말 성실하게 글을 써주셨습니다. 저자 분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무척 행복했습니다. 쉽게 비관하지 않고, 쉽게 낙관하지 않고, 어려운 순간에도 다정한 사람들. 악수를 할 때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손이 따뜻한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저자 분들의 따뜻한 손과 눈빛을 생각하다가 책 제목이 지어졌습니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채효정 저 | 포도밭출판사
처음으로 책에 ‘편집자의 말’을 실었습니다. 저자 채효정 선생님이 집필을 제안하셨어요. 제가 글을 엮었으니 한마디해야 한다고. 무척 어색하고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책이니만큼 나도, 나부터, 그 뜻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국 편집자의 말을 썼습니다. 채효정 선생님이 기쁘게 읽어주셔서 저도 걱정과 달리 마음이 놓였고, 그리고 무언가 후련했습니다. 어두운 글을 썼지만... 모르겠습니다. 후련했습니다.
*최진규 충북 옥천에서 포도밭출판사를 운영하고 책을 펴낸다. 편집자로 출판일을 시작했고, 책 디자인을 같이한 지는 7년째다. 땡땡책협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활동하며 출판물 및 웹사이트 디자인을 협업하고, 인디자인 배움 강좌를 진행한다. 지은 책으로 『출판, 노동, 목소리』(공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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