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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의 꽤 괜찮은 책] 어떤 도전 -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1월호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은 제목 그대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읽어보자던 세계 문학 전집을 마침내 한 권 한 권 읽어 나간 기록이다. (2021.11.05)
“이건 완전 빅 브라더 아니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이 난 지인의 말에 맞장구치는 동안 실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빅 브라더’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조지 오웰의 『1984』 속 독재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은 풍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지, 어떤 존재로 그려지는지는 책을 읽지 않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빅 브라더가 어떤 데요?” 물어볼 수도 없고. 물론 특정 책을 읽지 않은 게 결코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모두가 다 아는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조금 창피했다. 더군다나 서평집까지 냈고, 평소 상당량의 책을 읽는다고 알려진 사람이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1984』 뿐 아니라 흔히 ‘고전’으로 불리는 세계 문학 전집을 거의 읽지 않았다. 대학 전공 교재와 학창 시절 필독서라고 하여 강제로 읽은 몇 권이 전부다. 그 시절에도 책은 좋아했으나 장르 소설이나 대중 소설이 많았고, 순수 문학 중에서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쓴 작품이 대다수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는 사후 10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다는 나가사와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를 보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사는 시대와 동떨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체 왜 읽는담?
그렇게 어릴 때는 지루하고 감흥이 없어 피하고, 조금 커서는 훨씬 재미있는 작품이 많아 눈길을 주지 않다보니 자연스레 고전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결국 앞선 사례처럼 고전이 화제로 떠오르면 멋쩍은 상황에 처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마음먹고 읽자니 모두가 다 아는 작품을 뒤늦게 접한다는 사실이 흥이 나질 않았다. 독서에도 분명 ‘신상’이 주는 짜릿함이 있는데. 그럼에도 이전과는 다르게 고전만이 지닌 매력이나 가치도 인정하게 되었기에 마음 한편으로는 다짐하곤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꼭 한번은 읽어봐야지.
그런데 어쩌면 청소년 시절에 청소년 필독서를 읽지 않고 어른이 된 것이 나 뿐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니 소위 ‘독서가’라는 이들 중에도 당연히 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책을 읽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마르케스를 비롯하여 카프카 등 대문호의 작품을 실제로 읽은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꽤나 드물었다. 대개 나와 비슷하게 중고등학생 때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성인이 된 이후에는 청소년 시기에 당연히 졸업했어야 할 고전을 읽는다는 사실이 왠지 부끄러워서 읽지 못했다고들 했다. 어쩌면 오랜 세월을 버티며 살아남을 만큼 인류의 본질을 응축시킨 고전 문학을 애당초 청소년들에게 ‘필독서’라며 권장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30년 가까이 교정 교열 편집자로 일한 김정선 작가 역시 서점의 전집 코너를 바라보며 늘 생각했다고 한다. ‘저걸 다 읽은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람일까’ 하고 부러워하면서, ‘나도 언젠가는 읽어볼 수 있겠지’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고.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1』은 제목 그대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읽어보자던 세계 문학 전집을 마침내 한 권 한 권 읽어 나간 기록이다. 건강 문제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대전으로 거처를 옮긴 뒤 오랫동안 꿈꿔온 작업에 착수한다. 바로 세계 문학 전집을 읽는 일. 그렇게 9개월여 동안 작품 수로는 70편, 권수로는 1백 권의 책을 읽어나간다.
출판계의 베테랑조차 세계 문학 전집 앞에서는 작아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소간 반가움을 느낀 한편, 나 역시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개별 작품에 대한 상세한 줄거리가 곁들어져 있어 읽어보진 않은 책에 대한 글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에 따라붙기 쉬운 전형적인 해석이나 뻔한 감상 대신 날카로운 통찰을 곁들인 신랄한 비판이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편집자 특유의 ‘매의 눈’으로 책 전체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찾아내기도 하고, 보통은 지나치기 쉬운 작품의 맹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속편은 아류작의 오명을 벗기는데 급급하다 거기에만 매몰되었다든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의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치기 어리고 과한 설정이 많다든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는 주인공 요조와 연정을 나누는 연상의 여인이 대거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세계 문학 전집에 대한 독서 기록만이 이 책이 가진 매력의 전부는 아니다. 책에는 9개월간 낯선 타지에서 생활하며 우울증과 고군분투하는 그의 일상이 함께 담겨 있다. 저자로서 북 토크를 하고, 오랜 친구와 통화하며 위로를 나누고, 고민거리를 안고 찾아온 동생과 술상을 앞에 두고 흉금을 털어놓으며, 장마 빗소리를 듣고 아파트 베란다 창밖을 내다보고, 반려식물인 연필 선인장을 돌보고, 주기적으로 정신과에 방문하여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는 나날들. 겉으로는 잔잔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그 무엇보다 들끓으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문학 전집을 읽는 일은 사실 그에게 있어 일종의 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 사람이, 벼랑 끝에 다다랐다고 느낀 사람이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어떤 일. 아무런 기대도 대가도 없이, 누구를 만족시키려는 의도도 없이, 그저 자신만을 위한 작업. 스스로를 위한 도전이자 마음의 치료. 그가 ‘그간 읽은 책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지금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끝까지 책을 읽어나간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안에 조용히 그를 향한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 것 또한 마찬가지. 내면에서는 언제나 파도가 휘몰아치는 사람으로서의, 그럴 때마다 책으로 도피하는 사람으로서의 동병상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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