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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하루] 서툴게 전하는 진심 - 김혜진

에세이스트의 하루 25편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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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마주 앉아 고구마를 까먹으며 끝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듣다 보니 나는 친정집에서 무언가를 잔뜩 얻어오는 막내딸이 된 기분이다. (2021.11.03)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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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시댁에서 김장을 일찍 했다. 10월 중순에 김장이라니 너무 이른 듯했지만 마침 김치가 똑 떨어진 참이어서 잘되었다 싶었다. 이틀에 걸쳐 담근 김치들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며칠 동안은 다른 반찬 없이 겉절이와 깍두기를 흰밥 위에 올려 먹었다. 아직 익지 않아서 조화가 덜 이루어진 듯한, 배추와 무의 아삭함과 젓갈의 담백한 짠맛, 마늘의 알싸함, 생강의 톡 쏘는 향과 맛을 하나하나 느끼며 꼭꼭 씹어 삼켰다. 김장을 한 직후에만 맛볼 수 있는 이런 김치의 맛을 좋아한다. 시간이 흘러 익은 김치에서 나오는, 자연을 품은 풍성한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냉장고에 가득 차 있는 김치통을 바라보고 밥 위에 얹어 먹는 김치를 맛보며 빈틈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익지 않은 김치를 먹다가 동생이 생각났다. 결혼하지 않은 30대 중반의 동생은 나보다도 음식을 잘하고 혼자 김장도 하는 살림꾼이다. 손이 커서 음식은 늘 넉넉하게 하고는 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퍼준다. 나도 동생이 한 김장김치를 든든히 받아오기도 하고, 가끔 들를 때마다 싸 준 파김치나 깍두기, 밑반찬들을 싸 와서 잘 먹곤 한다. 친정집에 다녀오면 음식 솜씨 좋은 동생 덕에 한동안 우리 집 식탁은 다양한 색과 맛의 음식들로 즐거워진다. 동생과 다르게 평소에 살뜰하게 챙기지 못하는 나는 이 풍요로운 기분을 동생과 나누고 싶었다. 친정도 지금은 김장을 하기 전, 김치가 떨어졌을 시기일 것이다. 우리 집 김치를 나누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동생을 불렀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동생 팔에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다. 그 안에는 직접 만든 만두와 고춧가루 두 봉지, 조미김, 떡, 향신료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니, 김치를 받으러 오랬더니 뭘 이렇게 많이 싸오냐며 한마디 했다. 그 말에 동생은 그 상자 속의 식재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봇물 터지듯 마구 늘어놓는다. 나는 '어후, 또 이야기가 길어지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막 구운 고구마와 김장할 때 만들어놓은 무채 김치를 내어놓고는,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만두는 갑자기 먹고 싶어서 만들어봤는데 만두피 반죽이 잘 안 됐어. 찌면 만두피가 퍼지니까 꼭 튀겨먹어야 해."

"고춧가루는 친한 언니네서 농사지은 건고추를 사서 삼 일간 깨끗하게 닦고 닦아서 방앗간에 가져가서 빻은 거야. 정말 고생해서 나온 고춧가루니까 아껴먹어"

"김이랑 떡은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싸 온 거니까 애들 줘."

"향신료는 내가 좋아하지 않은 향이라 가져왔어."

식탁에 마주 앉아 고구마를 까먹으며 끝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듣다 보니 나는 친정집에서 무언가를 잔뜩 얻어오는 막내딸이 된 기분이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더 넉넉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챙겨주려고 한 김치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나는 동생에게 내심 미안해졌다. 이렇게 늘 나는 동생에게 많이 받는다. 음식도, 물건도, 마음도.

성격이 너무 다른 동생과 나는 어린 시절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보통의 형제자매 지간이 그렇듯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교를 당하며 지내왔기 때문일까. 둘 다 표현에 서툰 편이라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동생과는 서먹한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그러던 우리는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어느 틈엔가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결혼을 준비할 때는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라서 여러 부분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도 고민을 했는데 혼주석인 엄마의 자리에 아빠와 친한 고모가 앉을 것일지, 우리와 친하고 자상하게 챙겨준 이모가 앉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만 했다. 

이런 집안의 대소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소소한 부분에서 무엇을 챙겨야 하고 어떤 부분은 유연하게 넘겨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부재를 깊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동생에게 이런 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은 나의 이런 상황에 대해 따뜻한 위로는 해줄 수 있어도 마음 깊은 이해를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뚝뚝하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동생과 자주 다투면서도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며 많이 기대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시어머니께서 나를 챙겨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그 반면에 남편에게는 챙겨줄 장모님이 안 계셔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말을 동생에게 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도움이나 조언을 받을 엄마가 없다는 것에 상실감이 크게 느껴진다는 말도 했다. 동생은 늘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저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는 하기 힘든 깊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내가 챙겨줄게. 친정엄마 없다고 서운하거나 쪽팔리지 마라."

몇 년 전 함께 여행을 가서 술을 마신 동생은 말했다. 예전에 했던 말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고,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이 챙겨줄 테니 주눅 들지 말라고 한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 말에 당황해서 "그래. 고마워."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내가 그동안 하던 말들을 그저 듣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많이 신경 쓰고 있었구나. 나는 그저 편하게 이야기한 것인데 내가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자고 한 것 같아서 미안해지기도 하고, 동생의 애틋한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동생에게 어떤 표현으로 응답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지둥 댔다. 동생의 말에 납작했던 나의 내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삶의 구멍들은 메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동생의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어보곤 한다. 그냥 그 자체로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이다. 평소에 우리는 서로에게 살가운 말은커녕 퉁명스러운 말들의 티키타카로만 시간을 보내는 자매지간이다. 그날 이후 그 이야기를 다시 듣지는 못했으나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느낌, 나를 지탱하는 깊은 뿌리와도 같은 안도감을 주는 동생이 있음을 늘 기억한다.

"만두 너무 맛있다.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서 먹으니 만두피도 바삭해져서 괜찮아. 잘 먹을게."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동생은 볼품없이 만들어서 조금만 가져갔는데 더 가져다 줄 걸이라며 아쉬워한다. 나도 보낸 김치 잘 먹고 필요하면 더 가져가라고,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해 줄 테니 말하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나누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동생이 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동생과 나는 서로 나눈 음식들을 먹으며 그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는 동생에게도 내가 챙겨줄 거라고, 어디 가서 주눅 들지 말라는 나의 마음을 함께 전달한다.




*김혜진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글이 되어 특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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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혜진(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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