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특집] 사사로운 아이돌 덕생 사전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0월호
아이돌을 향한 덕후 인생의 기승전결을 이해하기 위한 10개의 키워드 (2021.10.19)
보통의 인간, 그게 머글이다. J. K. 롤링의 『해리포터』에는 숱한 마법사와 마녀들이 등장하고, 그와 구별되는 인간 존재를 머글이라고 불렀다. 이제 보통의 수준에서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일반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머글은 ‘(아이)돌판’을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 호감을 얻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덕질을 시작하고서도 현실 부정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잠시 호감이 생긴 것뿐이야, 이번 앨범만 마음에 드는 거야, 멤버 중 하나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한사코 아직은 팬이 아니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시기다. 이미 앨범 공구에 참여하고, 굿즈를 사 모으고, 공식 팬카페와 펜 페이지에 가입 완료돼 있는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세계관은 재정의된다. 마블이 마블의 세계관을 갖고 있듯, 아이돌 역시 나름의 세계관을 갖는다. 이때의 세계관은 가상으로 설정된 세계를 의미한다. 2011년 엑소는, 태양계 외행성을 뜻하는 엑소플래닛에서 그룹 이름을 차용하고, 멤버들 역시 염동력, 시간, 공간, 물, 불 등의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데뷔했다. BTS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모티프 삼아, 알을 깨고 나와 조금씩 성장하는 과정을 세계관으로 채택했다. 아이돌이 세계관을 설정하면, 팬들은 그 세계관에 충실한 놀이를 펼친다. 그게 이 시대의 팬질이다.
일반인 코스프레. 코스튬플레이의 정점은 그냥 완벽한 머글로 보이는 것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아이돌 세계에 발 들인 적 없는 척하는 제법 괴로운 코스프레다. 괜한 오해로 욕을 먹을 때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고, 진짜 일반인들 사이에서 칭찬받을 때 뒤돌아서서 웃는다. 전자든 후자든 선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 혹은 방심하는 순간 일코 해제된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응원의 기본은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이왕 듣는 것, 차트 상위권에 안착하도록 만드는 게 좋다. 그러려면 음원 사이트에서 스트리밍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걸 줄여서 스밍이라고 한다. 차트 반영 스밍은 그냥 하지 않는다. 특정 곡 재생, 랜덤 재생, 반복 재생 말고 전체 재생을 해야 한다. 일코를 위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끼워 넣기도 한다. 뮤스는 뮤직비디오를 스트리밍하는 것이고 이때에도 광고를 건너뛰거나 음소거를 하지 않아야 한다. 숨 쉬듯 스트리밍 해야 한다. 그걸 숨스라고 한다.
포토카드를 줄여서 포카라고 한다. 고유명사급이 되어서 해외 팬들도 ‘poca(phoca)’라고 한다. 앨범을 낼 때 포함되어 있다. 포카를 모으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 팬들 사이에서 포카만 따로 상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팬들이 앨범을 뜯으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게 포카라는 사실을 아이돌도 알고 있고, 어떤 멤버의 포카가 들어 있을지 기대하며 언박싱하는 게 팬들의 즐거움이다.
최고로 애정하는 멤버, 그게 최애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좀 더 예쁜 손가락은 있기 마련이다. 가장 마음이 가는 멤버는 그룹 팬질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룹 팬질의 가장 곤란한 점은 최애가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악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최애를 가장 열심히 까는 사람이 안티 팬이 아니라 그룹 내 타 멤버 악개인 경우 팬심이 더 뜨겁게 타오르게 된다. 조심해야 한다. 그러다가 악개가 된다.
플랫폼 시장이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 이때에 아이돌 팬질 역시 플랫폼을 떠나서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없게 됐다. BTS와 YG 소속 아이돌은 위버스, SM은 버블을 이용하고, 아이즈원이나 강다니엘, 브레이브걸스 등은 유니버스를 통한다. 위버스는 인스타그램의 프라이빗 버전으로 아이돌과 팬들이 댓글로 소통한다. 버블과 유니버스는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 유료 구독한 팬들에게 아이돌이 직접 팬들과 카톡을 한다. 일상적인 사진도 보내고, 밥은 먹었는지 톡도 해준다.
현실 세계에는 4인조 아이돌 에스파가 있고, 가상 세계에서는 인공지능 아이돌 ‘ae(아이) 에스파’가 있다. 그래서 에스파는 4인조인 동시에 8인조다. 현실 멤버들은 인공지능 시스템인 나비스(Navis)의 도움을 받아 싱크(Synk)라는 연결 신호로 아바타와 이어진다. 아이돌 그룹은 저마다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심에 아바타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미래와 아이돌을 결합한다. 당연히 팬질 역시 현실 세계 저 너머로까지 확장된다. 아이돌이 하면 팬들도 한다.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것처럼, 아이돌 팬질도 그렇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저 호감이었던 그룹이나 멤버에 스며들어 어느덧 팬이 되어버린 순간을 일컬어 덕통사고라 한다. 덕통사고를 겪은 머글을 치유할 방법은 제대로 된 팬질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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