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새롭게 느끼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 비발디와 막스 리히터의 “사계”
비발디와 막스 리히터의 “사계”
음악으로 그린 인위적 ‘가을’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가을’의 소리를 겹칠 때, 우리의 가을은 더욱더 아름답게 확장됩니다. (2021.10.14)
계절을 예측하기 어려워진 시절을 살고는 있지만, 여전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세상을 사는 모든 이에게 유사한 경험과 기억을 제공하는 강력한 이미지를 가졌습니다. 새싹이 파릇하게 돋고 꽃이 피는 봄, 청명한 소나기와 강렬한 햇빛이 눈부신 여름, 풍성한 곡식과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화려한 가을,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살을 에는 추위로 정신이 번쩍 드는 겨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인류 공통의 소재이지요.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에게도 사계절은 뚜렷한 성격을 가진 매력적인 주제였습니다. 1725년, 그가 작곡한 “화성과 인벤션(기악 다성음악)의 실험, Op.8”에는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총 열두 곡 들어 있습니다. 두 권의 악보집에 여섯 곡씩 나누어 출판되었는데 그 중, 1권의 첫 네 작품이, 봄(La primera), 여름(L’estate), 가을(L’autunno), 겨울(L’inverno)입니다. 각 협주곡은 계절을 묘사하는 소네트(14행으로 구성된 유럽의 정형시)를 따라 시어가 표현하는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릴 수 있도록 작곡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이야기나 이미지를 묘사하는 음악을 표제음악이라 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가진 사계절을 연주하는 협주곡, 비발디의 <사계(Op.8 no.1-4)>는 화려함이 극치에 달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대조적인 소재를 각각 대조적인 분위기를 가진 세 개의 악장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독주 악기와 관현악단이 대립과 조화를 이루는 협주곡이라는 장르로 다층적이며 입체적인 구조를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독주가 전경(前景)에 관현악이 후경(後景)에 위치하는 소리의 층위는 이리저리 얽히고 조합되며 고정되지 않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음향을 제공합니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발디는 바이올린의 다양한 기법과 음향을 활용해 독주악기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며 더욱더 생생하게 자연과 시의 이미지를 묘사했습니다.
삼백 년이 지났음에도 비발디의 <사계>는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텔레비전 광고, 지하철 안내방송, 학교 종소리, 심지어 전화벨 소리까지 어디서든 사계의 선율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이 사랑을 받아 수없이 반복된 탓에 이젠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사계>는 아무리 비발디의 음악이 탁월하고 아름답다 해도 전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끝없이 반복되었고,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 같은 사계절처럼 말이죠.
그래서 독일 작곡가인 막스 리히터(1966- )는 비발디의 사계를 재창조하기로 했습니다. 계절을 묘사하는 사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사계를 생생하게 박아 넣은 비발디의 음악을 되살리는 작업이었지요. 작품마다 ‘빠르게-느리게-빠르게’ 속도를 가진 원곡의 3악장 뼈대를 유지하고, 누구나 들으면 악장을 특정할 수 있는 상징적인 선율이나 리듬을 사용해 듣는 이가 비발디의 사계를 떠올릴 수 있도록 작곡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 원곡중 ‘봄’을 연주하는 보이스 오브 뮤직과 바로크 바이올린 주자, 알라나 유세피안의 음악을 먼저 듣고 리히터의 ‘봄’을 들어 보세요.
봄 1
봄 2
봄 3
바이올린 협주곡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관현악 음향은 훨씬 가볍게 만들고, 전자 음향을 더한 리히터 고유의 색채는 비발디의 사계에 완벽하게 섞여들어 갑니다. 미니멀리스트인 리히터는 반복되는 음형을 음악의 재료로 주로 사용하는데 비발디의 사계는 그의 작곡 언어에 완벽하게 들어 맞습니다.
‘가을’도 들어보세요. 거의 차이가 없는 듯 들리지만, 원곡에서 음표를 하나씩 빼, 비대칭 리듬으로 만들어 버린 리히터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는 없는 신선한 ‘가을’을 들려줍니다.
보이스 오브 뮤직, 클라라 무어 바로크 바이올린 독주
가을 1
보이스 오브 뮤직, 신티아 프라이포겔 바로크 바이올린 독주
겨울 3
리히터가 재창조한 비발디의 <사계>는 익숙한 음악을 낯설게 만들어 우리가 다시 그의 음악을 재발견하도록 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선율이 새로운 맥락에서 들려올 때, 우리의 귀는 그제야 깨어나 진심으로 듣기 시작합니다. 비발디의 사계를 재해석한 후, 리히터는 그만의 방법으로 다시 사계절을 묘사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주변에서 계절을 알려주는 풍경 소리 녹음을 음악 재료로 삼아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리히터만의 <사계>를 작곡한 것이죠.
그림자 3
그림자 3은 ‘가을’입니다. 곤충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 자연을 그대로 음악에 담고, 비발디의 세 번째 협주곡, '가을'에서 연주되었던 하프시코드를 음악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처럼 주변 환경의 소음을 녹음해 음악을 작곡하는 기법은 R. 머레이 셰퍼(1933-2021)의 ‘소리 풍경’ 혹은 ‘사운드스케이프’라 합니다. 음악을 악기 소리로만 제한하는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어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를 무대로 확장해 가능한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다루는 생각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음악으로 그린 인위적 ‘가을’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가을’의 소리를 겹칠 때, 우리의 가을은 더욱더 아름답게 확장됩니다. 또한, 현대적인 리히터의 전자 음향이 비발디가 살던 시대의 하프시코드 소리와 겹쳐질 때는 시간과 문화를 구분 짓는 음악의 경계도 ‘가을’이라는 익숙한 주제 안에서 부드럽게 사라집니다.
음악이 묘사하는 사계절은 눈에 보이는 자연일 수도 있고, 그 계절을 사는 우리의 심리일 수도 있습니다. 계절을 묘사하는 예술 작품이 거꾸로 우리에게 계절을 알려주는 상징이 될 때, 실제 자연은 예술 앞에서 그림자처럼 자신을 감출 수도 있지요. 리히터는 계절로 대표되는 우리의 삶과 자연, 비발디의 <사계>, 그리고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연결되고 얽히는지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예술가가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새로운 창작 방법을 보여주는 이유는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기를, 반짝이는 감동을 위해 현재에 몰입할 순간을 전달하기 위해서랍니다. 깊어 가는 가을, 두 예술가의 선물과 함께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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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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