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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노 타임 투 다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와 헤어져야 할 시간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시리즈
과거의 아픔을 안고, 개인으로 독립하여, 새로운 사랑을 이룬 본드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까.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콘셉트는 ‘가족’이다. (2021.09.30)
007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의 첫 번째 본드 영화 <007 카지노 로얄>(2006)과 007 탄생 50주년 기념작 <007 스카이폴>(2012)과 시리즈의 대표적인 악당 집단 스펙터를 부활시킨 <007 스펙터>(2015)는 연결해서 볼 때 의미가 더 확연해진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하기 전까지 007 시리즈는 제임스 본드의 남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면서 사건과 이를 해결하는 볼거리 위주의 액션에 힘을 준 측면이 강했다. (그것이 영화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다르게 언급한 세 편의 007 영화는 예전에 다뤄진 적 없는 본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시리즈를 진행했다.
<007 카지노 로얄>은 본드가 왜 한 여자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벼운 관계만 즐기는지 절절한 사연을 밝혔다. <007 스카이폴>은 상관이자 유사 부모이고 애증의 대상인 M(주디 덴치)과의 관계를 통해 본드 개인의 독립에 초점을 맞췄다. <007 스펙터>에서 본드는 심리학자이자 <007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던 악당 미스터 화이트(제스퍼 크리스텐센)의 딸 매들린(레아 세이두)과 불가능으로 보였던 사랑을 꽃피웠다.
과거의 아픔을 안고, 개인으로 독립하여, 새로운 사랑을 이룬 본드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까.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콘셉트는 ‘가족’이다. 은퇴 상태의 본드는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서 매들린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던 중 스펙터로부터 뜻밖의 일격을 당한다. 본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매들린이기 때문에 본드는 매들린과 스펙터의 내통을 의심하고 이 때문에 둘은 남남으로 돌아선다. 그로부터 5년이 시간이 흐른다.
무적 상태의 본드는 미국 CIA로부터 사라진 박사를 찾아달라는 청을 받는다. 문제의 박사가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던 중 스펙터의 수하로 들어갔던 것. 박사는 특정 DNA에 반응하는 생화학 무기를 개발한 장본인이다. 치명적인 무기가 스펙터의 손에 들어갔으니 이보다 더 위기일 수는 없다. 다행히 본드가 박사를 찾고 보니 이 모든 일이 스펙터의 손에 가족을 잃었던 사핀(라미 말렉)의 음모이었고, 매들린과 사핀 사이에 모종의 사연이 있음이 밝혀진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본드는 사핀을 저지하는 데 있어 단독으로 움직이기보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본드의 영국 정보부 은퇴 후 첩보명 007은 이제 2년 차인 노미(라샤나 린치)에게 넘어가 둘은 경쟁 상대가 되어 사사건건 부딪친다. 박사를 찾겠다며 숨어 들어간 쿠바에서는 첩보 훈련을 받은 지 몇 주 되지 않았다는 팔로마(아나 디 아르마스)의 도움을 얻는다.
그리고 사핀과 악연으로 엮인 매들린은 과거 007 시리즈의 본드걸처럼 본드의 보호를 바라거나 그에 대한 교환 가치로 성적 대상화의 위치에 서는 대신 자기의 목숨은 물론 본드에게 닥치는 불시의 위험에 조력자로 나서기도 한다. 무엇보다 매들린에게는 자신 말고도 지켜야 할 어린 딸이 있다. 바로 마틸다이다. 매들린에게는 이제 본드와의 사랑을 거쳐 엄마로서 가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건 본드에게도 마찬가지이어서 매들린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마틸다는 가족과 다를 바가 없다. (본드와 마틸다의 더 정확한 관계는 영화 후반에 밝혀진다!) 부모의 위치에서 자식은, 그리고 가족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이자 희생의 가치이다. 직업적 특성상 본드는 지금까지 타인을 살상하는 일로 존재를 증명해 왔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처지가 바뀌어 타인을 지키려 자신을 희생하는 임무로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희생한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는 차원을 넘어 죽음까지 불사하며 지켜온 가치를 남기고 물려준다는 뜻에 더 가깝다. 007의 오리지널리티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본드와 노미는 사핀의 조직과 맞서면서 목적하는 바와 지향하는 가치가 같다면 이름의 주인을 두고 다투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는다. 시대는 변화하고 그에 맞춰 시대 정신의 질서는 바뀔지 몰라도 사랑과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는 함께 보폭을 맞추고 손을 잡을 때 더 빛나는 까닭이다.
독립에서 사랑으로, 가족과 희생의 가치로, 매 작품 보폭을 넓혀 가며 성장의 마침표(?)를 찍은 다니엘 크레이그는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마지막으로 본드 역할과 안녕을 고할 예정이다. 이번 영화의 상영 시간은 163분, 무려 3시간에 달한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향해 예우를 갖춘 마지막 인사라고 할까. 벌써 차기 제임스 본드 역할을 두고 누가 맡을지 기대와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빗발친다. 중요한 건 누가 맡든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의 유산은 이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제임스 본드는 그 가치 그대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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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