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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닌자와 번역가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8화
영어를 번역하는 내가 영어로 번역하는 제니퍼 크로프트의 고충과 고민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책에 실린 모든 단어의 주인이면서도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심정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모든 번역가의 숙명 같은 것이니까. (2021.09.17)
문제 : 아래 여섯 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 한강 지음, 『채식주의자』(창비, 2007)
-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정영목 옮김,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문학동네, 2018)
-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최성은 옮김, 『방랑자들』(민음사, 2019)
- 조카 알하르티, 『천체』(국내 미출간)
-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불편한 저녁De avond is ongemak』(국내 미출간)
- 다비드 디오프, 『모든 피가 검은색인 밤Frère d'âme』(국내 미출간)
정답 : 위의 책(엄밀히 말하자면 영어판)들은 2016년 이후 부커 국제상 역대 수상작이다. 2016년은 (저자에게만 시상하던) 부커 국제상이 5만 파운드(약 8000만 원)의 상금을 저자와 번역자에게 절반씩 나눠 지급하기 시작한 해다. (참고로 2019년 맨그룹이 후원을 중단하면서 명칭이 맨부커상에서 부커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위의 문제에는 정답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영어판 표지에 번역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의 번역자 제시카 코언, 『방랑자들』의 번역자 제니퍼 크로프트, 『천체』의 번역자 매릴린 부스, 『불편한 저녁』의 번역자 미셸 허치슨, 『모든 피가 검은색인 밤』의 번역자 안나 모스코바키스의 이름은 영국에서 출간된 영어판 표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제목을 클릭하면 영국 아마존에 등록된 영어판 표지를 볼 수 있다.)
어젯밤 아내에게 이 얘길 했더니 “왜 그러는 걸까?”라며 내게 되물었다. “표지에 이름이 여러 개 있으면 독자가 헷갈릴 수 있고 디자인 측면에서도 별로여서 아닐까”라고 엉겁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왠지 마뜩잖았는데, 『방랑자들』 영어판의 번역자이자 번역자 처우 문제를 공론화한 제니퍼 크로프트의 《가디언》 기고문을 읽어보고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위 문제와 정답의 아이디어도 그녀의 것이다). 크로프트에 따르면 출판사들은 “독자는 번역가를 신뢰하지 않으며 책이 번역서인 줄 알면 사지 않을 것이다”라고 내심 가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어판 표지에는 번역자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데, 영어 독자와 한국어 독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영어판 번역자는 표지에 실리지 못했을까? 언뜻 납득이 되지 않아 한참 고민하다 깨달았다. 외국 저자가 한국어로 책을 쓴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국제 공통어 영어가 자신의 언어인 사람들은 외국(즉, 비영어권) 저자가 영어로 책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 말이다. “번역가는 닌자 같아서, 눈에 띄면 좋지 않다.” 《가디언》 기고문 첫머리에 인용된 이스라엘의 작가 겸 번역가 에트가르 케레트의 말은 영어판 번역의 현실에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제 번역가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전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서왕모 강림』(알마, 출간 예정)을 번역하면서 영어판 번역자 오틀리 뮬제트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녀는 『서왕모 강림』 한국어판에 대한 번역 저작권료가 지급될 것인지, 한국어판 판권면에 영어판 번역자인 자신의 이름이 실릴 것인지 확답을 듣고 싶어했다. ‘판권면에 번역자 이름이 실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싶어 내가 예전에 중역한 책들을 들춰보니 영어판 번역자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어판 번역이 다른 언어 번역본의 저본으로 쓰이는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기에 나로서는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하긴 크로프트 말마따나 “번역서에 들어 있는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번역가의 몫”이다. 물론 번역서의 문장들을 오로지 번역자의 것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내가 번역한 책의 모든 단어가 나의 두뇌와 손가락을 거친 것은 사실이니까. 왜 이전엔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크로프트의 문장 중에서 맘에 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독자가 낯선 책을 집어 들도록 격려하는 것은 유능한 가이드와 함께 흥미진진한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설렘이다.” 유능한 가이드와 함께할 때 여행의 수준과 즐거움이 훨씬 커진다는 건 여행 깨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영어를 번역하는 내가 영어로 번역하는 제니퍼 크로프트의 고충과 고민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책에 실린 모든 단어의 주인이면서도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심정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모든 번역가의 숙명 같은 것이니까.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세상의 모든 번역가들이 말 그대로 연대連帶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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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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