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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시간에 굴복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영화
필모그래프가 주름살이고, 쌓여가는 편수가 노화하는 피부라고 한다면 샤말란에게 감독의 나이 듦은 퇴화라기보다 성숙과 깊이를 보증하는 증표와 같다. (2021.08.19)
고급한 리조트 내의 사유지라는 점만 빼면 경관이 수려한 여느 해변과 다를 바가 없다. 정체불명의 시체 한 구가 물에 떠내려오면서 분위기가 묘해진다. 스릴러 장르에서 이 정도 설정은 전형(cliche)에 속한다. 평범한 연출자라면 살인범을 찾는 흥미 위주의 전개로 관객의 관심을 붙들겠지만, <올드>의 감독은 M. 나이트 샤말란이다.
<식스 센스>(1999)에서 앞선 이야기를 꼼꼼하게 되짚어보게 하는 반전의 연출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까닭에 ‘반전의 제왕’으로 통한다. 반전의 충격파 여부에 따라 종종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샤말란은 인간이 품은 불안감을 <언브레이커블>(2000)의 슈퍼히어로물, <사인>(2002)의 재난물 등 익숙한 장르 형식에서 낯설게 풀어가는 연출로 필모그래프를 구축한 연출자다.
<올드>는 프랑스 그래픽노블 <샌드 캐슬>(2011)을 원작으로 한 샤말란의 신작이다. 아버지 가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와 어머니 프리스카(빅키 크리엡스)와 딸 매덕스(알렉사 스윈튼, 토마신 맥켄지 등)와 아들 트렌트(놀란 리버, 알렉스 울프 등) 가족은 리조트에서 소개받은 외딴 해변에 놀러 갔다가 시간당 2년 정도로 시간이 급속하게 흐르는 것을 감지하고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해변에 숨겨진 비밀을 반전으로 삼는 <올드>에서 흥미로운 건 결말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사건과 그로 인한 의혹 제기다. 의문의 시체를 시작으로 여덟 살의 매덕스와 여섯 살의 트렌트가 해변에 들어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10대 초중반으로 눈에 띄게 성장하여 부모를 경악하게 하고 이에 탈출을 시도하려는 주변 사람들이 특정 지점에서 두통을 호소하며 정신을 잃는 등 예측 불가의 전개가 관객의 혼을 뺀다.
샤말란이 ‘아버지의 날’에 딸들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원작 그래픽 노블이 지닌 설정의 독창성이 우선이지만, 샤말란은 원작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더해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를 강화했다. “우리는 왜 시간을 모두 소비하는 것에 대하여 무서워하는가? 만일 갑작스럽게 앞으로 살 시간이 얼마 안 남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빠른 시간에 맞선 인간의 대응을 서스펜스의 요소로 활용하여 그 자신만의 작품으로 개비했다.
그러니까, <올드>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시간(의 속도) 속에서 얼마나 주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는지에 관한 실존주의를 고찰하는 작품이다. ‘아침에는 아이, 점심에는 어른, 저녁에는 노인’이 되는 시간 속에서 혼란해 하고 분열하며 삶의 의지를 잃기도, 타인을 해하기도,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며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다양한 형태의 인간 군상을 제시한다.
주어진 시간의 끝을 죽음으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미친 속도로 흐르는 해변의 시간은 장르로 치면 호러물에 해당한다. 샤말란은 <올드>가 그 이상의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호러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러 영화의 지향점이 공포라면, <올드>는 다른 방향에 도달한다. 그것은 더 강한 믿음의 세계이다.” 주어진 시간과 속도의 흐름 속에 휘말리고 찢기는 대신 파도에 몸을 맡기듯 자신을 던져 믿음을 가지고 살길을 모색하는 것.
<올드>의 반전은 <식스 센스>처럼 그 전의 사연을 복기하게 만들기보다는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는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해변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의혹들은 시간이 삶의 환경을 변화시켜도 삶의 조건까지 바꾸게 하는 건 아니라는 전제조건이다. 삶이란 누군가와 손잡은 가운데 의미가 발생하고 그래서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희생하여 얻은 삶의 가치가 죽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샤말란의 믿음이 반전으로 강조되는 것이다.
샤말란의 연출자 경력은 30년에 가깝다. <올드>에서 가이 가족을 의문의 섬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출연하는 등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하는 샤말란의 외모는 크게 세월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관련해, 나이대를 달리한 배우들의 다인 일역으로 발육 속도가 빠른 매덕스와 트렌트의 성장을 나타낸 것과 달리 가이와 프리스키와 같은 성인은 늘어가는 주름살과 노화하는 피부로 나이 듦을 표현했다.
필모그래프가 주름살이고, 쌓여가는 편수가 노화하는 피부라고 한다면 샤말란에게 감독의 나이 듦은 퇴화라기보다 성숙과 깊이를 보증하는 증표와 같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설정과 관객의 허를 찌르는 반전의 솜씨가 여전한 가운데 ‘우리는 왜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하는가?’ 도전적인 질문 속에 삶에 관한 대가의 시선까지 담았다. <올드>는 샤말란에게 앞으로도 ‘새로운 New’ 설정과 소재와 연출의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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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