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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은 신화를 어떻게 이용했는가? :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신화
한승훈의 신화의 질문 6화
성서 이야기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던 고대 신화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자료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2021.08.13)
종교학자 한승훈의 '신화의 질문' 칼럼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화를 새롭게 읽으며, 인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만나 보세요. |
중세 후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서는 로마 제국과 그리스도교 이전 조상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갔다. 이전까지 성서 이야기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던 고대 신화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자료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8세기의 사상가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신화가 민족의 특유한 가치와 집단 정체성을 담고 있는 “시적 영혼의 완벽한 지리학”이라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윌리엄 존스는 오늘날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불리는 언어학적 범주를 발견했다. 현재의 인도, 유럽, 이란 등에 퍼져 있는 다양한 언어 집단들이 아득한 고대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공통 조상(아리아인)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이었다.
하나는 민족주의(nationalism), 다른 하나는 범(凡)민족주의(pan-nationalism)라고 불려야 할 두 가지 아이디어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절묘하게 융합되었다. 유럽 각국의 민족들은 각자의 신화에서 용맹한 정복자들이었던 고대 아리아인의 기원과 민족이동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들은 위대한 고대 정복민족의 후예인 동시에, 현재의 국토에 정착하게 되면서 단일하고 고유한 민족성을 가지게 된 집단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땅-신화-민족”의 결합에 대한 믿음 하에서 그림 형제의 독일 신화, 민담 연구나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화적 오페라 창작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런 프로젝트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다. 『신화 이론화하기』에서 브루스 링컨은 아리아 민족주의의 성장과 함께 그 “적대적 타자”인 셈족(특히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자라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아리아인들과 전혀 다른 집단인데도 스스로의 땅을 갖지 못하고 유럽의 민족들에게 빌붙어 사는 이방인이라 여겨졌다. 근대 민족국가들의 세계에서 유대인은 종교적 타자만이 아니라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오염시키는 인종적인 타자가 되어 갔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정치 혐오와 이민족 차별 정서를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아리아인’은 고대의 원민족에서 단일한 혈통을 가진 인종집단으로 둔갑하였다. 그리고 게르만인이야말로 아리아 인종의 혈통과 문화를 가장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 집단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조상들처럼 전 세계를 지배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는 선동이 이어졌다.
나치의 지도급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Der Mythus des zwanzigsten Jahrhunderts, 1930)는 나치즘의 신화 이론을 대표하는 저서다. 어찌나 황당한 내용이었던지 그 히틀러와 괴벨스마저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경멸했다고 하지만, 이 책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함께 “제3제국의 양대 베스트셀러”라 불릴 정도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의하면 정복자 아리아 인종의 “건강하고 우수한” 신화는 각 지역의 비아리아적인 문화와의 “교배”를 통해 오염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 신화도 경건함, 숭고함, 질서, 정신력을 상징하는 제우스, 아폴론, 아테나 등의 아리아적 요소가 쾌락, 황홀함, 무질서, 성적인 것을 상징하는 포세이돈, 디오니소스, 헤르메스, 데메테르 등의 비아리아적 요소와 섞이면서 활기를 잃고 더럽혀져 있다는 식이다. 그는 예수 또한 아리아 인종이었으나, 그리스도교가 비아리아인인 바울의 추종자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타락했으며, “게르만 인종”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아리아 정신을 조금이나마 되찾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순수한 아리아인의 정신을 보존하고 있는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제국의 종교를 “긍정적인 그리스도교”로 개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체가 불분명한 아리아인이 특정 인종 집단과 동일시되고, 예수조차 아리아인으로 만드는 인종주의 신화 이론을 보며 비웃기만 할 일은 아니다. 나치즘에 공감하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은 1970년대의 저작들에서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동이”를 “동이족”이라는 민족집단으로 취급하며 한국인이 그 적통이라는 주장을 널리 퍼트렸다. 공자가 동이족이었으며, 유교도 동이족의 사상이라는 언설도 그즈음 출현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중국인이 동이족 조상의 옛 땅과 문화적 성취들을 빼앗은 적이며, 일본인은 동이족의 열등한 후예라는 등의 배타적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사실상 나치즘의 복제품인 이 이데올로기는 군사정권 시기의 역사교과서 파동 이래 공교육과 대중문화 속으로 끊임없이 침투하고 있다. 아리아 인종주의의 악령은 한국인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기마정복민족의 후예라고 상상하는 유사역사학의 신화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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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링컨> 저/<김윤성>,<최화선>,<홍윤희> 공역25,200원(10% + 1%)
신화는 서사 형식의 이데올로기다 신화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려는 기존의 시도들이 어떤 계보를 따라 펼쳐져왔는지를 확고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추적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신화 분석 방법들과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다양한 신화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고 있다. 그는 신화란 무엇인지를 딱히 정의하지 않는다. 신화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