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릭, 이랑 “들어줄 누군가가 있어 위로가 됐어요”
『괄호가 많은 편지』
편지를 쓰면서 큰 위로가 됐어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느끼는 감정도 공통점이 많으니까요. (2021.08.09)
복잡한 서울 하늘 아래, 뮤지션 이랑과 슬릭은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때로는 전염병 시대를 함께 헤쳐가는 여성 예술가로, 때로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랑이’와 ‘김령화’로. 모두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슬릭은 종종 ‘공부하러 가겠습니다’로 끝을 맺었고, 이랑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두 사람은 웃음과 진심을 『괄호가 많은 편지』에 정성껏 담았고, 들어줄 누군가가 있어 큰 위로가 됐다고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한 흔적은 남아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이랑이 슬릭에게, 슬릭이 이랑에게 그랬듯이.
<주간 문학동네> 연재 당시부터, 뮤지션 슬릭과 이랑의 조합을 반긴 독자들이 많았어요. 특히 제목 ‘괄호[과:로]가 많은 편지’가 눈길을 끌었죠. 어떻게 정해졌나요?
슬릭: 프롤로그부터 괄호가 많죠.(웃음) 누군가 편지에 괄호가 많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러고 보니 괄호가 ‘과로’로도 읽히더라고요. ‘어, 그거 너무 좋다!’ 하면서 완성된 아이디어예요.
이랑: 괄호를 많이 쓰는 게 재밌더라고요. 본문에 담기에는 애매한 내용도 담을 수 있고. 예를 들면, ‘제가 대학생 때, 전자음악 동아리(ㅋㅋㅋ)에 가입했습니다.’ 이렇게 쓰는 거죠. 하하.
통하는 것도 많은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났나요?
슬릭: 우와, 기억나세요. 랑쌤? 저는 편지에도 쓴 것처럼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때였을 거예요. 멀리서 수상 트로피를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보면서 말했죠. 와 짱이다! 완전 힙하다! 저 사람 분명히 망원 살면서 고양이 키울 거야!
이랑: 하하하. 아마 만나서 대화 나눈 건 한강에서 야외에서 열린 여성주의 페스티벌 킥이었죠?
슬릭: 맞아요. 그때 공연 대기실에서 만나서 놀고 재밌었는데. 그날 라인업 진짜 좋았죠. 페미 행사 4대 천왕 총출동!(웃음)
“대재난 시대에 살고 있는 두 여성 예술가”(22쪽)로서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근데 아직도 팬데믹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슬릭: 첫 번째 편지 제목인 ‘이 시국에 안부를 묻는 건 실례일까요’라는 문장이 아직도 유효해요. 여성 인디 창작자에게 지금 안부를 묻는 건 실례이긴 하죠. 안 그래도 죽겠는데 잘 지내냐고 물으면, ‘응’이라고 대답해야 하잖아요. 뮤지션은 저작권료가 적어서 행사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행사가 취소되니까 타격이 크거든요. 지금은 공연 대신, 글쓰기나 영화 관련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이랑: 저는 잘 지낸다고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살아만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바꿔가면서 대답해요. 저는 가계부를 열심히 쓰는 사람이라 2019년과 2020년의 수입을 비교해봤거든요. 근데 공연 행사가 사라지니까 금액이 정말 많이 줄어든 거예요. 타격이 커서 작년에 연재처도 많이 찾고 출간 계약도 해서 올해 한, 일 합쳐서 5권의 책이 나와요. 슬릭과의 편지 연재도 그때 시작된 거죠.
슬릭: 글 연재가 처음이었는데 랑쌤과 함께해서 너무 든든했어요. 먼저 책도 많이 쓰셨고 출판사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도 다 아시더라고요. 저는 무조건 ‘넵!’만 외쳤거든요.(웃음) 배운 게 많아요.
편지에서 뮤지션 슬릭과 이랑이 아닌, ‘랑이’와 ‘령화’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랑 작가님은 본명으로 활동하는 고충을 말하기도 했는데요. “언젠가부터 이름 뒤에 붙는 호칭들에 위화감을 느낀 지 조금 되었”(25쪽)다고요.
이랑: 저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본명 ‘이랑’을 활동명으로 써 왔어요. 보통 한국에서는 이름이 세 글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닉네임인 줄 알고 ‘이랑’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근데 그게 저한테는 어린 시절에 ‘이랑!’하고 혼나는 것처럼 들려서 피로감이 심했죠. 그래서 친구들한테는 일부러 ‘랑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어요. 그래야 제 이름이 다정하게 들리고, 이랑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슬릭: 이름이 외자여서 그런 일이 생겨버렸네요. 저는 한 번도 ‘김령화’ 세 글자로 불려본 적이 없고 그냥 ‘슬릭’과 ‘령화’였거든요. ‘김령화 씨!’ 하면 혼나는 기분이 들겠지만, 누가 ‘슬릭!’ 하면 바로 ‘네, 슬릭입니다.’ 하죠. 하하.
두 분의 대학 시절도 엿볼 수 있었어요. 이랑 작가님은 동아리방에서 생활하셨고, 슬릭 작가님은 수업보다는 힙합에 매진했다고요.(웃음)
슬릭: 맞아요. 늘 부모님들이 대학 가면 원하는 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저는 진짜 마음대로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배우고 싶었는데, 대학에 가자마자 고삐가 풀린 거죠. 학교는 음악을 방해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수업은 열심히 안 들었어요. 근데 학점 망해도 잘 살아요. 하하. (이랑: 끄덕끄덕) 랑쌤은 어때요? 편지에도 많이 나와서 재밌었는데.
이랑: 저는 휴학도 많이 해서 7년 정도 학교를 다녔어요. 살 곳이 없는데 기숙사는 배정을 못 받았거든요. 그래서 동아리방에 고양이 준이치와 함께 살림을 차린 거죠. 학교 건물이니까 전기세도 안 내도 되고 공간도 넓고 정말 풍족하게 살았어요. 동아리방에 고양이가 있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져서, 학생들한테는 고양이 구경 시켜주면서 친해지고,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와도 잘 지내고. 돈이 떨어지면 학교에서 장터도 열고,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나름 장사에 철학이 있어서 옷 같은 건 미술원 친구들한테 팔고, 잡동사니는 영상원에 가서 팔고.(웃음) 그때는 정말 부끄럽다는 생각 하나도 안 하고 즐겁게 지냈어요.
슬릭: 학교 시설을 정말 잘 활용하셨군요. 최고다. 저는 학교 가면 맨날 집에 갈 생각밖에 안했는데. 하하.
편지를 읽고 위로를 받았다는 리뷰가 많더라고요.
슬릭: 편지를 쓰는 저희도 위로가 됐어요. 심리치료 받는 느낌!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느끼는 감정도 공통점이 많으니까요. 편지를 읽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첫 글이었는데도, 마감이 두렵지 않았어요. 답장이 오면, ‘이번엔 뭐라고 써 있을까’ 두근거리면서 편지를 열어봤던 기억이 나요.
이랑: 정기적으로 말할 상대가 있다는 게 되게 안심되더라고요. 말로 하는 대화는 기억하기 쉽지 않은데, 편지는 다 남잖아요. 함께 쌓아나가는 기분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그리고 편지가 다른 작업에 비해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에요. 과로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다른 일 때문에 늘 과로 상태였지만. 하하.
두 분은 ‘여성예술가’로서 입장을 표명할 때, 부당한 비난을 들은 경험도 공유했어요. 슬릭 작가님은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대화도 시도한다고 했고요.
슬릭: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듣고 배우는 것도 많아서, 대화를 하는 편이에요. 사실 상상의 나래를 이만큼 펼칠 수 있는데 일부러 한쪽 면만 봐야지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최근에 너무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지치긴 했는데요. 이렇게 대화가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에, 저희에게 편지가 더 소중했던 것 같아요. 무슨 내용을 써도 내 입장에서 이해하고 답장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비슷한 일을 겪어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위로가 됐고요. 점점 정보의 분량이 짧아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긴 분량의 감정과 이야기가 오가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연재 당시, 낙태죄 폐지 운동이 뜨거웠어요. 이랑 작가님은 여성으로서 겪은 폭력을 이번 편지를 통해 나누기도 했어요.
이랑: 제 경험을 원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싶었고, 그게 슬릭한테 보내는 편지였어요. 앞서 트위터에도 짧게 임신 중지 경험을 남겼는데, 직후에 온갖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당장 나와서 너의 경험을 말해라’는 식이었고, 그게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안 나가겠다고 하면 무서운 반응이 돌아오고요. 안전한 공간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말할 기회를 스스로 찾겠다고 말했고, 슬릭한테 보내는 편지에 쓴 거죠.
슬릭: 저는 그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머릿속에 다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편지가 좋은 게 공백이 있잖아요. 메신저는 바로 답장해야 하는데, 편지는 상대의 말을 곱씹어 보고 고민할 시간이 있으니까 좋았어요. 결국 답장은 속초에 다녀와서 썼어요. 익숙한 곳에서 멀어지니까 써지더라고요.
이랑 작가님은 답장을 특별히 고심했던 편지가 있었나요?
이랑: 마지막 편지가 고민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령화가 슬릭이라는 이름을 짓는 날’을 상상해서 썼어요. 슬릭이 학교 메일을 써서 답장에 ‘정경대학 미디어학과 김령화’라고 뜨거든요. 제 취미가 남의 인생을 상상하는 거니까 령화는 어떻게 이름을 짓게 됐을까 생각해봤어요.
슬릭: 정작 저는 아무 고민 없이 지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슬릭 괜찮은 것 같은데. 슬릭으로 갑시다’ 이렇게.(웃음) 그 뒤로 이름 설정할 때마다 ‘슬릭’으로 썼어요. 그때는 발표한 노래도 없고 가수도 아니어서 언제든지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여기까지 온 거죠. 이제 못 바꿔요.
이랑 작가님은 고양이 ‘준이치’, 슬릭 작가님은 ‘또둑이’의 집사예요. 슬릭 작가님은 또둑이를 잃어버렸을 때의 경험을 편지에 쓰기도 했어요.
슬릭: 또둑이를 잃어버렸을 때, 정말 ‘동물권’이 절실하게 와 닿더라고요. 제 가족을 잃은 경험이었으니까요. 사람도 살기 힘든 동네에서 또둑이를 잃어버려서 찾는 데도 애를 먹었는데요. 그때 동물이 살기 어려운 시대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비인간종의 삶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됐어요.
이랑 작가님은 준이치를 간병하고 있죠.
이랑: 준이치가 아프고 나서 너무 많은 게 바뀌었어요. 옆에서 돌봐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계속 보고 있으면 더 사랑스러운 것을 왜 나는 맨날 일만 했지 싶더라고요. 원래 전 일 중독이어서, 일어나자마자 작업실 나가서 일하고 밤늦게 돌아와서 지쳐서 자는 생활을 16년간 했어요. 그렇게 일했기 때문에 지금 준이치 치료비에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거지만, 스킨십도 더 많이 하고 좀더 붙어 지낼 걸 지난날이 아쉽긴 해요.
곧 3집 앨범이 나온다고요.
이랑: 제목은 <늑대가 나타났다>입니다. 저는 스스로 ‘사랑이 가득한 혁명가’를 만드는 펑크 락커라 생각해서 ‘혁명’ 컨셉을 의도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이전 앨범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제가 화자가 아닌 곡이 많아졌어요.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줬으면 하나요?
슬릭: 긴 호흡으로 대화하면서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랬거든요.
이랑: 책을 낼 때마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음, 편집자님이 저는 편지에 ‘사랑’, 슬릭은 ‘공부’라는 말을 많이 쓴다고 한 게 떠오르네요. 저는 스스로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슬릭: 칸트세요?) 하하하. 알고 보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 마음을 편지에 풀어낸 것 같아요. 독자분들도 편지를 읽다 보면 각자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슬릭 (Sleeq) 경기도 구리 출생 뮤지션. 본명은 ‘김령화’이다. 정규앨범 〈COLOSSUS〉 〈LIFE MINUS F IS LIE〉를 발표했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스트리트 출신 고양이 또둑이, 인생이와 함께 살고 있다. *이랑 (李瀧) 1986년 서울 출생. ‘한 가지만 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가수이자 작가, 영상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청소년기에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생활 중 취미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해 결국 영화와 음악, 그림 그리는 일을 전부 직업으로 삼고 있다. 2011년 싱글 앨범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데뷔, 2012년 정규앨범 1집 [욘욘슨]을 발표했고, 2016년 정규 앨범 2집 [신의 놀이]를 발표했다. 저서로는 『이랑 네컷 만화』(2013), 『내가 30代가 됐다』(2015), 『MY BIG DATA』(2016),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등이 있다. 단편 영화 『변해야 한다』(2011), 『유도리』(2012)를 발표했고, 뮤직비디오, 웹드라마 감독으로도 일하고 있다. 2019년 첫 소설집 『오리 이름 정하기』를 발표했다. 이랑은 본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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