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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조지 오웰과 술과 담배
<월간 채널예스> 2021년 8월호
이걸 읽은 독자는 오웰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책을 깊이 사랑하고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서라면 별 허접한 이유까지 만들어낸다. (2021.08.02)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도스토옙스키와 조지 오웰이라고 답한다. 그 중에 롤 모델이 누구냐고 물으면 조지 오웰이다. 석영중 교수의 『매핑 도스토옙스키』(이 책 강력 추천합니다)와 『도스토옙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나서 그런 마음이 더 굳어졌다. 인간 도스토옙스키 씨는 매력적이긴 하지만 삶을 본받기는 곤란한 인물이다. 그 유명한 도박벽 외에도 지질함과 순진무구한 경제관념과…… 민폐 덩어리다. 석 교수님도 책에서 혀를 여러 번 차신다.
어떤 꿈을 꾸건, 무슨 일을 하건 멋진 역할 모델이 있으면 좋다. 그와 나의 닮은 점을 꼽으며 용기를 얻고, 그와 내가 닮지 않은 점을 살피며 나의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 혹은 지켜야 할지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조지 오웰과 닮은 점 찾기’는 나의 심심풀이 유희가 되었다(닮지 않은 점이 더 많은 건 나도 잘 안다).
오웰과 장강명의 공통점으로는 저널리스트 출신 소설가라든가, 르포르타주와 장편 SF를 출간했다든가(『1984』는 SF로서도 정말 훌륭하다), 칼럼을 엄청나게 많이 썼다든가, 문학 관련 오디오방송 프로그램 제작진이었다든가(오웰은 BBC에서, 나는 팟캐스트에서), 자기 조국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무척 사랑했다든가 하는 사항이 먼저 떠오른다.
번드르르한 ‘미문’과 현학적인 표현을 혐오하고 쉬운 문장을 고집했다는 것도 같다. 오웰은 에세이 「정치와 영어」에서 다른 칼럼니스트들의 실명을 언급해가며 ‘젠체하는 용어’와 ‘무의미한 단어’, ‘지저분한 비유’를 통렬히 비판하는데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읽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나는 시절이 아주 좋을 때에도 문학 비평은 사기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썼는데 사실 나도 비슷하게 느낀다.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 체제를 끔찍하게 여기고 비판하다가 그 체제에 우호적이거나 온정적인 당대 문인 진영과 불화했다든가(오웰은 소련, 나는 북한), 소설에서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깊이 다룬다든가(『동물농장』은 그런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1984』는 그런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상세히 묘사한다) 하는 점도 덧붙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번에 쏜살문고에서 나온 오웰의 산문집 『책 대 담배』의 책장을 넘기던 중 그와 나의 공통점 하나를 또 발견했다. 이 책 가장 앞에 실린 에세이 「책 대 담배」를 읽다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 이거 내가 〈채널예스〉에 연재하는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원고랑 너무 비슷하잖아!
번역서 기준으로 7쪽짜리인 이 산문에서 오웰은 자기가 가진 책이 몇 권인지, 그 책 구입비가 얼마인지, 자기가 1년에 담뱃값으로는 얼마를 쓰는지, 영국 성인 남성이 음주와 흡연으로 지출하는 금액은 얼마일지 등등을 길게 추산한다. 결론은 뭐, 독서가 흡연보다 경제적인 여가 활동이라는 거.
이걸 읽은 독자는 오웰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책을 깊이 사랑하고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서라면 별 허접한 이유까지 만들어낸다. 둘째, 그는 자신의 소박한 단상을 시시콜콜 잘도 늘어놓는다. 아마 성격도 원래 그런 듯하고, 장담할 순 없지만 소재 압박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모두 〈채널예스〉 칼럼을 쓸 때 내 마음가짐과 너무 비슷하단 말이지.
오웰의 에세이 중에는 「코끼리를 쏘다」나 「교수형」처럼 묵직하고 비장한 작품이 유명하다. 그 산문들은 물론 감동적이지만 나는 오웰의 작고 시시콜콜한 글도 좋아한다. 그 중 백미는 「물속의 달」인데, 내용인즉 ‘이런 가게가 있으면 좋겠어’ 하고 상상 속의 맥줏집을 자세히 묘사한 것이다. 흑생맥주를 팔아야 하고 병맥주 판매 코너가 있어야 하고 마당이 있고 전화는 공짜이고 어쩌고. 그런데 이 에세이 덕분에 현재 영국에는 ‘물속의 달’이라는 상호를 쓰는 펍이 많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이번 칼럼의 서론이다(아, 시시콜콜하도다!). 본론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쓸 건고 하니, 오웰이 그랬으니까 나도 술과 담배에 대해 자질구레하게 써볼까 한다. 그리고 알코올과 니코틴이 화제로 나온 김에 카페인과 다른 약물에 대해서도 몇 자 적어도 좋을 것 같은데, 허락된 원고 분량에 여유가 있으려나.
우선 술 이야기부터 하자면, 내게 알코올은 늘 맥주다. 간혹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막걸리나 와인을 마시게 되는 경우는 있는데, 그런 때에도 체면치레만 한 다음 얼른 맥주로 갈아탄다. 막걸리나 와인보다 독한 술은 마시지 않아서, 위스키도 바이주(白酒)도 잘 모른다. 칵테일은 내게는 이름도 맛도 대개 조잡하고, 소주는 희석식이고 증류식이고 간에 싫다.
단 맥주에서는 종류를 가리지 않아서, 라거와 에일을 똑같이 사랑하고, 바이젠도 스타우트도 보크도 다 즐긴다. 세종은 너무 맛있다. 국내 대기업 맥주도 싫지 않다. 람빅은 아직 못 마셔봤다. 괴상한 맛이라던데. 마트와 편의점과 보틀샵을 돌아다니면서 신기한 제품들을 사서 냉장고에 쟁여둔다.
이런 맥주들을 ‘물속의 달’처럼 멋있는 펍에서 마시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그냥 집에서 혼자 마신다. 성격도 내성적인 데다 다른 사람과 마시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부담스럽다. 빨리 마시는 편이라 다른 이들과 속도도 안 맞는다. 어떤 이들은 ‘술은 싫지만 술자리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맥주가 좋고 술자리는 싫다.
이런 맥주 사랑이 집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일단 음주가 영감을 주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 알코올과 창조성에 별 연관은 없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합리화 중인 술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알코올이 작가에게 다른 종류의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 알코올은 위안을 준다.
전업 작가 생활은 굉장히 외롭다. 나는 가끔 세상에 나처럼 외로움을 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나도 때로 사무치게 외롭다. 사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전업 작가가 되고서야 겨우 제대로 느꼈다. 처음에는 그 어색하고 막막한 기분이 뭔지 몰라 며칠 당황했다. 한참 뒤에야 아, 이게 외로움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우리가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무척 복잡다단한 심리로서, 아마도 한 종류가 아닌 듯하다(즉 용어 자체가 좀 부정확하다). 세상에는 사람의 영혼을 충만하게 만드는 외로움도 있다. 초여름 해가 질 무렵, 쓸쓸하고 아름다운 갯벌 바다 앞에서 그런 감정을 음미한다. 반면 전업 예술가의 고독은 삶 자체에 흥미를 잃게 하는, 피로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는 어떤 긴 작업을 혼자 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왜 하는지, 왜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달리 없다. 그걸 남한테 설명하다 보면 비참한 기분에 빠진다. 왜냐하면 대체로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고, 의도와 결과물도 딴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설명해줘도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가면을 쓰고 살게 된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듯이 가면도 그의 삶의 일부가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귀가 너무 아파서 마스크의 존재를 깨닫게 되듯이,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이라는 감각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구차한 현재와 전망 없는 미래, 변변찮은 능력과 실현 불가능한 이상 사이의 괴리 같은 것들을.
그런 때 알코올이 도움이 된다. 내게는 맥주가 현실과 자아 사이의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공업용 본드가 스티로폼을 녹이듯 알코올이 자아의 표면을 녹여 흐물흐물하게 만들고 까칫한 현실에 들러붙게 해준다. 그러다 남용하면 자아 깊은 곳까지 변성시키겠지.
사실 꽤 무섭다. 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닐까? 알코올 의존증 자가 테스트를 어떤 종류로 해봐도 결론은 항상 같다. 중독은 아니지만 경계선에 있다고. 최근에 다니엘 슈라이버의 『어느 애주가의 고백』을 읽다가 몇몇 대목에서 내 모습이 그대로 보여 소름이 끼쳤다. 그 전에 읽은 하종은의 『왜 우리는 술에 빠지는 걸까』 역시 무시무시했다. 두 책 모두 ‘절주는 없다, 단주만이 답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나는 절주에 가냘픈 희망을 걸어 보기로 한다. 다른 이유는 없고, 맥주가 너무 맛있으니까. 건강하게 오래 마시고 싶다. 낮에 마시지는 않으려고 하고, 이틀 연속 마시는 일도 피해야겠다. 그런데 유혹에 못 이겨 결심을 어기는 날도 잦다.
술과 달리 담배는 이제 옹호할 여지가 없는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재떨이가 있고 1990년대 중반까지도 비행기에 흡연석이 있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 담배를 배워 20대 초반에 꽤 피웠고, 그 뒤로는 간간이 입에 댔다. 궐련을 마지막으로 문 것은 3년 전, 전자담배는 지난해다.
니코틴과 창조성도 큰 관련은 없다. 다만 담배도 ‘현실 접착제’ 역할은 조금 했다. 몇 년 전까지는 원고가 잘 안 풀리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 밖에 나가 한 대 피우고 돌아왔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보고 있자면 세상에 내가 하는 일보다 덧없는 게 확실히 한 가지는 있구나 싶었다.
아파트에서 정해준 흡연 구역이 너무 멀고 겨울에 외투 차려 입고 거기까지 가는 게 귀찮아서 결국 끊었다. 더러운 구석에 패배한 얼굴로 모인 흡연 동료들을 보고 있자면 기분도 가라앉았고. 혐연권이 흡연권보다 훨씬 중요한 권리임을 알고 존중하지만, 금연 캠페인도 활발히 벌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가 흡연자를 너무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한다. 오염물질 배출로 따지면 자가용 운전자가 더 비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문학과 담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알베르 카뮈의 흑백 사진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이방인』의 표지에 사용된 바로 그 사진. 옷깃을 세우고 삐딱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카뮈는 도스토옙스키나 오웰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섹시하다. 그는 필터 없는 카멜을 주로 피웠다고 한다.
다른 이미지는 고요하게 펼쳐진 서해 바다와 갯벌이다. 이 심상 역시 거의 흑백 사진에 가깝다. 6년 전에 그런 풍경 속 펜션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아주 외지고 조용한 곳이었다. 썰물이면 도요새들이 모기떼처럼 몰려와 해변을 메우고 조개를 파먹었다. 밀물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소리가 졸졸졸 하고 들렸다.
그 펜션에는 이집트에서 온 시인이 있었다. 작은 절벽 위에 건물이 있었는데, 그녀와 나는 둘이서 낮에 식당 테라스에 나란히 서서 멍하니 바다를 내려다보며 같이 담배를 피우곤 했다. 마트도 편의점도 근처에 없고 글 쓰는 것 외에 다른 할 일도 없었다. 우리는 가끔 시시한 대화를 나눴지만 둘 다 영어를 별로 잘하지 못했다.
나는 영어로 번역된 이집트 시인의 시를 읽었다. 내 해석을 들려주자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나는 그 시를 원작으로 한 프랑스 단편 영화도 봤다. 시에서 묘사하는 한 장면이 영화에 빠져 있어서 그게 아쉽다고 말했더니 시인은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영화는 주연 배우가 뒤로 걸어가면서 끝났는데, 시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왜 배우가 뒤로 걸어가느냐고 물으니 시인은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며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나눴다. 마땅한 영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바다를 바라보았다. 전업 작가가 된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나는 많이 무서웠고 조금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좋은 외로움이었다. 자, 그러면 커피와 다른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른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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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